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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표심 Oct 06. 2022

1학년, [3대비극] 버스가 횡단보도를 덥쳤다

3대비극 중 첫째 사건

-학교 가는 길, 횡단보도.


  국민학교 1학년 
  밤에 눈을 감았다 뜨면 아침 8시였다. 아쉬웠다.

 

  학교를 간다. 아침 먹고 집을 나와 허술한 블록담과 시범아파트를 지나 우회전, 원효대교 북단을 뒤로하고 원효로를 쭉 걸어 내려갔다. 학교 가는 길 왼쪽에선 차들이 쌩쌩 달렸고, 나는 불그레한 벽돌담과 회색 벽 옆을 걸었다.  


  서부이촌동 집에서 남정국민학교까지는 2.5km였고, 어린애 걸음으로는 35분 거리였다.


  학교 정문까지 직선거리로 100여 미터를 남기면, 왼쪽 횡단보도에서 애들이 건너왔다. 횡단보도에서는 당번 선생님들이 호루라기를 삐리리~ 불면서, 노란 깃발을 들어 차들을 막아 세웠다.


  울긋불긋 가방을 멘 학생들은, 군데군데 뜯긴 흰 줄을 즈려밟아 횡단보도를 건너왔다. 수십 명씩 떼 지어 건너온 애들로 내 앞길이 복잡해지면, 나는 보폭과 보행속도를 줄였다. 앞선 아이들이 흔드는 신발주머니에 무릎이 부딪히지 않도록.



-자동차 깜빡이의 의미


  마주오는 차들도 원효로를 타고 여의도 쪽으로 올라왔다. 몇몇 차들은 내가 우회전하는 샛길로 들어오려고, 작은 사거리에서 서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소형 승용차들은 좌측 노란 등을 깜딱 깜딱~ 했고, 덩치 큰 검은 승용차 노란 눈은 점잖케 껌-떡 껌-떡 껌벅였다.

 

   차가 회전하는 방향으로 미리 번쩍번쩍~ 노란 불을 켜고 끈다는 것을 이때 알았다.

 

  걷다 보면 다리가 아팠다. 어려선 왜 그리 다리가 아팠던지. 입학 전 용문시장을 돌아볼 때도 다리가 아팠다. 흰색 타이즈가 종아리까지 오는 반바지를 입은 나는 몇 번씩 엄마를 불러 세웠다.


  "엄마. 다리 아파. 앉았다 가자" 이렇게 말하곤 그 자리에 쭈그려 앉기를 몇 차례 해야 했다.


  1학년이 된 이후로는, 시장에서도, 엄마에게 다리 아프다는 소리를 하지 않고 참았다.


 -길은 고통스러워, 내겐 자동길이 필요해


  1학년인 내게, 통학로는 멀게만 느껴졌다.


  이 길이 끝나기는 할까. 조금 걷는다 싶으면 종아리가 뻐근하고 발바닥에 열통이 왔다. 가끔 노란색 리라 국민학교 통학버스가 보이면, '저런 데는 누가 다니나' 부러워하며 걸었다.


  수업을 마치고 학교를 나설 때면, 집에 갈 길이 아득했다. 한강에서 맞바람이 세게 불어오면, 눈을 찡긋거리며 걸었다. 비바람이 불면 두 손으로 실내화 주머니와 대나무 우산 손잡이를 동시에 잡았다.


  비가 들이치면 하늘색 비닐우산을 앞으로 기울였다. 어깨와 발은 항상 젖었다. 중간에 버려진 우산이 있으면 이리저리 살펴보고 걸었다.


  날이 추워지면 움츠린 몸에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엄마와 함께 금식기도를 해야 하는 날에는 꼬르륵~ 소리를 내며 걸었다. 날이 춥고 배가 빈 날엔 몸을 덜덜 떨며 걸었다. 이런 날은 뒤에서 누가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발이 앞으로 잘 안 나갔다.


   그냥 제자리에 서 있어도 집에 도착하는 '자동길' 이 있었으면~


  생각해 보니, 자동길에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내 길과 다른 사람 길들이 모두 동시에 움직여 부딪힐 텐데, 그 걸 어떻게 풀어야 하지?


  -비닐장갑 낀 형사들

  

   서늘해져 긴바지에 긴 팔 옷을 입고 학교에 간 날. 왼쪽 길은 간판도 없고 벽돌과 회색만 나오니, 건너편 길로 건너가 집으로 향했다.


  다리에서 100미터쯤 떨어진 골목이 나왔다. 검은색 드럼통이 실린 리어카 한 대. 어른 두 명은 거기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손에는 투명 비닐장갑을 끼고 드럼통 속에 손을 넣고 있었다. 나는 '뭔가' 하고 다가갔고, 그 안에 사람 팔이 보였다.


  나는 놀라긴 했지만, 낮이었고 그 어른들이 형사라고 생각하니 그리 무섭지는 않았다. 뭐라 할 것 같아 그곳을 빨리 벗어났다.


  '누군가 저 사람을 죽여서 드럼통에 넣어 길에 버렸나 보다'

  '비닐장갑을 꼈으니 무엇을 만져도 손이 더럽혀지지 않을 거야'

  '얇은 비닐장갑이라 만지는 느낌은 나겠지'

  '나는 커서 형사는 되지 말아야지'


  이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향했다.


  방과 후 힘들면, 가끔 버스를 타러 갔다. 버스를 타기 위해 아침에 지나온 횡단보도 앞에 서서 차가 뜸해지기를 기다렸다. 거기엔 신호등이 없었다.

 
 -횡단보도 사고


  그 횡단보도는 남정국민학교 5천 명의 학생 중 4천여 명이, 소곤소곤 웅성웅성 재잘대며 건너 다니는 핵심 통학로였다.  


  차들은 원효대교 쪽에서 꽂아내렸고, 반대편에서는 여의도를 향해 처올라왔다. 하루 4천여 대의 차량이 질주하는 원효로에, 용산구청은 예산 문제로 육교를 만들지 않고 있었다.


  우려했던 횡단보도 교통사고가 났다. 입학 첫 해 1973년 10월 8일 월요일. 한글날을 하루 앞둔 날. 아침 8시 30분경. 내가 학교 정문을 통과하는 시각이었다.


  두 교사의 노란 깃발 신호에 따라 횡단보도를 건너던 50여 명을, 브레이크가 파열된 버스가 덮쳐 버렸다. 이 사고로 5학년 6학년 여학생이 숨지고, 9명이 크게 다쳤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횡단보도 녹색 보행신호를

  믿지 않았다.

 

  차도 사람도

  모두 고장 날 수 있으니까.




  이 일은 국민학교 시절 '3대 비극'( 1학년 횡단보도 사고, 4학년 블록담 사고, 5학년 여교사 변사 사고 ) 중 첫 번째가 되었다. 나와 얽힌 블록담 붕괴 사건은 브런치 글 '4학년, 서북서풍이 잔인하게 불었다'에 적어 두었다.



< 참고자료 >

· 서울남정國校(국교)앞 橫斷路(횡단로)서 길잡이 스승보는앞서 國校生(국교생)들 集團轢死傷(집단역사상), 동아일보, 1973.10.8


· 학교앞 횡단로(橫斷路)지도교사 눈앞서 등교(登校)길  어린이 역사(轢死), 조선일보, 1973.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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