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그림, 정답을 찾는 마음
"야~ 네 그림 상 받았어"
"뭐? 거짓말하지 마"
"정말이라니까"
"그게 사실이면 해가 서쪽에서 뜬다"
국민학교 2학년. 나는 해는 반드시 동쪽에서 뜬다는 믿음을 가지고 복도로 나갔다. 친구들 말은 거짓이야~
이게 왠 일. 내 그림이 전시돼 있었다. 그림 아래 달린, '입선'이라 쓰인 명함 크기의 하얀 종이. 색칠 고민 끝에 물감을 빨리 휘휘 발라버린 그림이 입선이라고? 물론 최우수, 우수는 아니었지만.
이 그림은 나무 한 그루가 뒷 산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나무를 고동색으로 칠하고, 물을 잔뜩 묻혀 녹색 산을 약간 얼룩덜룩하게 했는데, 이게 상을 탈 줄이야.
국민학교 입학 전부터 그림이 취미이긴 했지만.
취학통지서를 받기 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놀이는 그림 그리기였다.
내가 그린 비행기는 언제나 좌측을 향해 날아갔다. 자동차도 왼쪽을 향했고, 언제나 운전석이 보였다. 바퀴는 앞바퀴 1개 뒷바퀴 1개만 보였다. 대부분의 그림은 왼쪽을 향했다. 내가 오른손잡이라서 그런 건지.
이때의 내 그림은, 고대 이집트 그림처럼 입체가 아닌 단순 평면이었다.
사람은 앞모습, 옆모습 두 가지로 그렸다. 옆모습은 어려웠다. 코는 왼쪽을 향해 산처럼 튀어나오게 했고, 입술과 눈은 앞에서 본 모습의 반을 잘라 옆얼굴을 그렸다. 왼쪽 몸통도 앞모습의 절반으로 그렸고, 왼팔을 옆 몸통 안에 껴 넣었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옆모습을 그릴 때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다 승용차 그림만 진화를 했다. 전면 45도 좌측 위에서 보이는 성냥갑을 관찰한 후 그렸기 때문이다. 변화된 그림에선 앞바퀴 2개와 왼쪽 뒷바퀴가 비스듬히 보였다.
관찰을 해야만, 나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지만, 취학 전이나 후나 사람 그림은 여전히 어려웠다.
다시 2학년 미술시간. 선생님은 애들이 그린 분수 그림 6점을 교실 뒤 게시판에 전시를 했다. 그림 5개는 분수 모양이 비슷했다. 5점 모두, 물이 두 갈래로 위로 뿜어 올라가는 순간이 담겨 있었다.
왼쪽 물줄기와 오른쪽 물줄기가 위로 올라가다 곡선 언덕을 만드는 순간 멈춘 그림이었다. 삐삐가 마술봉을 두드려 시간이 멈춰버린 듯 공중에서 물이 얼어버린 그림이었다.
나머지 한 점은 내 그림이었다.
내가 그린 물줄기는 달랐다. 왼쪽에 3개, 오른쪽에 3개의 물줄기가 위로 뻗었다가 하강하여 분수 아래 바닥 물까지 닿아있었다.
어~ 내 그림만 다르잖아. 뭐가 맞는 거야. 남들하고 똑같이 그렸어야 하나? 아니야, 내가 맞는 것 같은데. 너희들은 다 틀렸어. 선생님은 왜 틀린 그림을 5개나 걸어 놓으신 거지? 내 그림이 진짜야.
나는 내가 맞다고 속으로 우기고 있었다.
평소, 나는 공원 분수를 볼 때마다 의문을 가졌었지.
'왜 분수 물은 넘치지 않는 거야?'
뿜은 양만큼 안 보이는 구멍으로 흘러 나가고 있어서 일까? 아니면, 올라갔다 떨어진 물을 계속 펌프로 돌리고 있어서 인가. 올라간 물은 떨어지고, 떨어진 물은 구멍으로 빠지거나 다시 올라간다.
나의 분수는 상승과 하강이었다. 다른 5개의 그림에서는 상승의 순간만 절묘하게 포착했지만.
자기 마음속 이미지가 그림으로 나온다. 그림에 정답은 없는데, 나는 정답을 그리려고 했다. 다른 애들은 순간포착 능력이 출중해 창의적인 그림이 나왔고, 나는 현실적인 그림을 그렸던 거겠지.
이렇게 정답을 찾아 헤매니 나의 삶은 고달팠나 보다.
5월이 되자 백철기 담임선생님은 내게만 과제를 주었다. 내가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하셨겠지.
"내일까지 집에서 수박 그림 하나 그려 오너라"
"네? 수박이요?"
"응, 교실 뒤에 붙일 거야"
"네~"
자신 없는데 대답은 왜 했는지. 정답을 찾아야 하는 내 머릿속은 분주해졌다. 둥근 수박을 연필로 그린 다치고, 색깔은 어떻게 하지? 머릿속에 정답이 없다.
외갓집 아직 고등학생인 막내 이모에게 뛰어갔다.
"이모. 수박 그림 색칠 어떻게 해요?"
"응, 초록색"
"아니. 수박 줄은 무슨 색이에요?"
"어? 음. 글쎄. 검은색인가?"
"아휴, 어떻게 해요~"
학교에서부터 낑낑대며 들고 온 것은, 수박 줄 색깔 걱정이었다. 머릿속에 들어있는 수박을 아무리 돌려봐도 수박 줄이 무슨 색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과일가게에 가 보자"
"과일가게요? 같이 가요"
수박 철이 아니었는지, 수박이 없다. 문방구에서 전과 책을 찾아봐도 수박 사진은 흑백이다. 아니~ 선생님은 왜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걸 시켜야지.
그냥 내가 그렸다. 흰색 도화지를 앞에 두고, 초록색 크레파스로 둥그런 타원형 수박을 그렸다. 수박 줄무늬는 검은색으로 칠하다가 너무 까마니 초록색을 그 위에 조금 문댔다.
다음날 선생님은 아무 말씀 없이 내 그림을 뒤에 걸었다.
국민학교 미술시간은 대부분 상상화였다. 그림은 상상이 맞는 거지? 정물화 말고는 뭘 보고 그린 적은 없었으니까.
머릿속 사진이 없는 데, 그림에 색칠까지 해야 하니 가슴에 화강암 바위를 얹어 놓은 것 같았다. 미술시간은 수없이 지나갔지만, 어깨너머로 보고 배울 기회도 없으니, 내 그림은 제자리걸음만 했다.
학교 미술시간이 점점 미워졌다. 색칠만 생각하면 가슴에 응어리가 졌다.
그래도 내 취미는
그림 그리기였다.
색칠하지 않는
그림 그리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