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소는 마음씨가 착하고 친구를 사랑하며, 악의 없이 해맑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은 적 있는, 기독교 근본주의 절대 신앙을 가지고 있다. 책이나 문학에 관심이 없었지만 자주 과장법으로 말했고, 유머와 표정이 풍부했다.
한 마디로 나와는 달랐다.
오소는 동남아에서 한국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한국음식점도 잘 된다고 말했다. 장난이 아니라고 했다. 한국음식은 너무 맛있어서 간만 맞으면미친 듯이 잘될 거라고 바람을 넣었다. 돼지는 밀림에서 사육한 것을 싸게 공수해 오면 된다고 했다.
의심스러웠다. 밀림?
나는 장밋빛 미래를 낙관하는 오소의 말에 색안경을 끼고 자주 질문을 했다.
"그래서 메뉴는 뭘로 할 건데?" "육절기 같은 것도 들여놓을 거야?" "주방일은 누가 볼 건데?"
당시 오소는 구체적인 그림은 아직없는 상태였다.
-내 질문에 답하면서 구체화
오소는 수익이 얼마 나면 프랜차이즈를 시작하고,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로 확대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다들 이런 거야?
큰 그림을 그리는 그에게 나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 질문했다.
그는 자주 내게 전화를 했다. 나와 통화를 하면 항상 그림이 그려진다는 이유였다. 그것은 내가 꼬치꼬치 물었기 때문이었다. 내 질문에 그가 방어적인 답을 하면서 사업을 구체화하는 듯했다.
임기응변으로 즉답을 하면서 그렇게 하면 되겠다고 혼자 좋아했다.
그는 내게 고깃집 운영을 미리 연습하라고 했다. 나는 일단 아내부터 고깃집에서 일해 보라고 했다.
아내는 고깃집에서 설거지와 부식자재 다듬는 일을 시작했다.
-아내의 고생
아내는 거기서 양파와 무 등을 몇 대야를 다듬는다고 했다.
점심과 저녁에 단체 고객들이 몰아치고, 기름 묻고 검게 그을린 쇠붙이 불판과 그릇이 설거지 감으로 쉴 새 없이 나오면, 혼자인 몸으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했다.
몸살로 허리를 펼 수 없이 고통할 때, 당시 중학생이던 둘째 아들이 도와주러 갔다가 현장을 목격하고는 충격을 받았다. 그 아이는 지금도 자기 엄마를 애처로운 눈으로 본다.
영하 10도인 날. 나는 아내에게 전해 줄 것이 있어 그 음식점에 갔다. 아내 이마에서 땀이 났다. 건물 1층에서 아내를 만났다. 하얗지만 뭔가 많이 튄 방수 앞치마에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있었다. 물을 밟아야 하니 장화도 신었다. 머리엔 흰색 조리 모자를 썼다.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