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P] 프레젠테이션,변화와 예술이 필요해 - 2
-비디오 아트
나도 OHP 발표가 처음이었다. 내 목표는 듣는 이들이 '초롱초롱 눈뜨는 것' 하나였다.
경영혁신 아이디어는 다른 팀 발표에서 대부분 나왔으니까, 나는 특색 있는 뭔가가 필요했다. 사람들을 깨워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졸지 않을까?
평소에 TV나 극장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던 것을 떠올렸다. 진행이 빠른 TV 드라마는 2-3 초마다 화면이 착착 바뀐다. 쉴 새 없이 바뀌니 구석구석 볼 새도 없다. 귀로 들어온 대사 따라가기도 바쁘다. 졸리면 바로 취침하려는 사람 말고는, 긴장하며 대화를 따라가야 한다. 이야기를 놓칠 수도 있으니까.
착착 바뀌는 화면 하면, 비디오 아트도 그랬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됐던 '백남준 비디오 아트' 브라운관에서도 쉴 새 없이 장면이 바뀌었다. 찌직거리기도 하면서, 영원히 바뀌면서 돌아가는 화면. 자세히 볼 틈을 주지 않았다.
내가 본 비디오 아트는 쉬지 않고 빨리 바뀌는 화면이었다.
-예술에선 어떻게 하지?
그림은 순간을 한 가지 시점으로 고정시키지만, 비디오는 시간에 따라 변화된 시점을 보여준다. 카메라 한 대만의 시선을 거부하고, 흐름에 따라 자주 다른 관점을 보여주는 TV, 영화 등 비디오 예술은 지루할 틈이 없다.
남자가 말할 때는 여자의 시선에서, 여자가 말할 때는 남자의 시선에서 화면을 잡아 몰입도를 높일 수도 있다. 시점이든 뭐든 변화와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이런 게 없다면, 나란히 앉아 서로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앞의 카메라만 바라보는 우리나라 뉴스처럼 경직된 몸짓만 보여줄 것이다.
평소 샤워 물소리를 들으면서, 도로를 달리면서, 되살리고 묵상(默想)했던 정리된 생각들을 이렇게 떠올렸다. 그래서, 나는 자료의 시점을 나누고, 많은 OHP 필름에 한 가지 핵심만 담으려고 했다. 100프로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만.
-팬은 조용히 돌고 있었다
밤 10시까지 진행된 발표 후, 사람들은 벽돌 건물들 사이를 걸어 숙소로 갔다. 건물 외벽에는 수많은 붉은 벽돌이 층층이 박혀 있었다. 방에 들어온 나는, 15장 필름을 20장으로 늘렸다. 한 장엔 한 가지 메시지만 담았다. 단순해졌으니 별도 종이에 대사를 적을 일도 없었다.
속으로 몇 번 연습을 해보고 누워 뒤척였다.
다음날 우리 팀 발표 시간. 나는 두툼해진 필름을 가지고 섰다. OHP의 강렬한 빛은 강당 커다란 하얀 스크린에 부딪혀 반사됐다. 열을 식히기 위해 OHP 몸체는 조용히 팬을 돌리고 있었고, 오전 시간이라 참가자들의 눈빛이 어제보단 맑아 보였다.
제일 먼저 네임펜을 밝은 OHP 판 스테이지 글라스 위에 올려놓았다. 네임펜 그림자가 선명히 스크린에 박히도록 초점 조절 손잡이를 돌렸다. 이제 네임펜을 내리고, 필름 첫 장을 올렸다.
-뒤집어졌다
"영화 데몰리션 맨. 우리 팀명입니다. 동사는 demolish ~ 무너뜨리다. 뒤집다라는 말입니다."
동그란 탁자에 빙 둘러앉아있는 사람들의 눈길이 내게 쏠렸다. 순간 목소리는 나만 알게 잠시 떨렸다. 심장은 수천의 말발굽 소리에 땅이 진동하듯 했다. 에이 모르겠다.
"오늘 데몰리션 맨 팀의 발표를 들으시면~ 여러분들은 뒤집어질 것입니다." 쉬었다가 계속 이어갔다.
"홀딱 뒤집어질 것입니다. 어이가 없어서~"
이때, 의자가 드르륵~ 뒤집어지는 소리가 났다. 한 사람이 쿵~ 엉덩방아를 찧었다. 사람들은 놀라서 웃었다.
나는 좌측 하단에 자그맣게 2라고 페이지 번호가 씐 필름을 올렸다. 배에 힘을 주고 경영혁신이란 항상 좋은 것인지, 어떻게 가능한지 차례로 말을 이어갔다. 올라온 OHP 필름은 30초를 목표로 한 장씩 교체됐다.
-달려 볼까나
준비한 대로 한 장이 올라가면, 나는 하나의 메시지만 말했고, 짧은 순간을 살다 간 필름은 다음 장을 위해 옆으로 폐기됐다. 강조할 부분이 나오면, 그쪽에 네임펜을 올려 지시했다. 전부 20장이니 30초에 한 장이면, 600초로 10분이지만, 내 발표는 13분 정도 걸렸다.
나는 도해나 그림이 그려진 필름을 계속 치우며 힘차게 달렸다. 점점 미쳐갔다. 청중도 얘기 속으로 들어왔다. 재미가 생긴 것 같았다.
"지금까지 제 얘기를 듣고, 뒤집어지신 분들 손들어 보세요."
"아니신 분들은 발 들어 보세요~ 감사합니다."
마무리 말에 관중은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되고, 쉴 수 있어 휴~ 숨을 쉬었다. 모든 팀 발표가 끝나고, 참가자들 각자가 투표를 해서 1등 팀을 정했다. 투표 집계 후 사회자는 3등부터 1등까지 거꾸로 발표를 했다.
-예술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1등 팀은~~" 뚜둥♪.
"데몰리션 맨~~ 입니다"
우리 팀은 자리를 박차고 난리였다. 사실 늦게 발표하는 팀에 유리한 것이지만, 이게 인생인걸. 여기서 나는, 방향을 잡아 쭉 밀고 가는 짜릿함을 경험했다.
그 후 10년이 지나, 중소기업 ceo 대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하게 되었을 때, 내 파워포인트 장표는 언제나 60페이지 이상이었다. 그때는 제안 발표를 하고 나면, 1시간 30분은 자연스레 지나갔다.
누구나 그렇듯, 지루하고 재미없는 시간은 참기 힘들다. 그래서 교훈으로 포장된 반복적 뻔한 언어엔, 내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린다. 지루하게 반복하는 내 말버릇과도 싸우기 버거운데, 나와 동질의 시간을 또 만나는 것은 낭비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변주와 속도를 느낄 수 있는
예술이 있다면,
그 예술을 만나고 싶다.
뻔한 건 피하고 싶다.
그건
내가 뻔하기 때문이다.
이해되는 색다른 관점의 예술을
좋아하고 싶다.
지루한 인생이 되면 안 되니까.
풍부한 인생이 좋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