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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표심 Sep 16. 2022

3학년, 경림이를 잃었다

나는 못난이, 바보

-방과후에도 함께 

  남정국민학교는 원효로 2가에 있다. 학교 정문 안쪽 우리 안의 원숭이 보는 것도 좋았지만, 경림이를 만날 수 있어 행복했다. 


  3학년 송웅순 담임선생님은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나를 방과후 독서반에 넣었다. 그 교실에서 다른 반 아이들과 같이 동화책을 읽고 집에 갔다. 거기엔 경림이도 있었다. 그렇다면 마다할게 뭐냐?


  동화책 속엔 '공주와 완두콩' 얘기도 있었다. 한 왕자가 폭풍우에 엉망이 되어 찾아온 공주를 테스트한다. 침대에 완두콩 하나를 놓고, 매트리스 12개, 오리털 이불 12겹을 깐 침대 위에서 자라고 한다. 공주는 '한 잠도 못 잤는데, 아래에 뭐가 있는 거냐'라고 묻는다.

 

  이렇게 감각이 예민한 공주를 최고 신붓감이라 여기고 왕자는 결혼을 한다. 이해는 되지 않는다. 예민한 여자와 살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르나 보다. 지금도 수수께끼다. 


  이 얘기는 경림이도 읽었을 텐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경림이 엄마

  방과후 독서반을 하면서, 경림이와 얘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얼마나 가슴이 벅찼을까? 선생님이 서로의 생각 나눔을 유도해 주었으면 삶이 얼마나 풍부했을까? 


  학교 밖을 나서면 경림이와 아무 말도 못 했고, 좋아하는 표정도 보여주지 못했다. 집까지 같이 가면서 얘기라도 했어야 하지 않나? 내가 경림이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날까 봐였나.

 

  경림이 엄마가 독서반에 찾아온 날, 아는 체 못하고 피했다. 내가 좋아하는 짝 엄마라서 부끄러웠다.


  "너는 왜 인사를 안 하니?"

  "아~ 네~ 저, 안녕하세요?"

  무엇이 그리 부끄럽고 창피한지. 그 엄마가 내 마음을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숨으려고 했다. 경림이 엄마 이름은 김창숙이었다. TV 탤런트 이름과 같았다. 머리는 경림이처럼 조금 길었다.


-심장도 뛰고 나도 뛰고

  경림이 엄마와 우리 엄마가 말한다. 경림이는 6시까지 꼼짝 안 하고 공부를 한단다. 뭐라고? 나는 집에서 책을 펼친 적이 없는데? 난 수업시간에 선생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그 입의 말을 들은 것 밖엔 없는데. 예습 복습은 생각도 안 한 내가 부끄럽긴 했다.

 

  근데 뭘 공부한다는 거지?


  집 근처 아파트, 작은 외할머니댁에 놀러 가다가 긴 머리 반짝이는 경림이와 마주쳤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얼른 손으로 가르마를 정리했다. 가서 말을 걸어야 한다. 웃는 얼굴을 보여야 한다. '경림아' 불러야 한다. 경림이의 똘망한 눈을 내 안으로 가져와야 한다. 그럼 그녀도 내 이름을 불러주겠지. 내 얼굴에 부드런 미소를 전하겠지. 와우~ 여기가 천국인 거야. 
 

  에이~ 바보같이. 

  나는 그녀 20미터 앞에서 뛰기 시작했다. 경림이 앞에서 내가 잘 뛸 수 있다는 것만 보여주고 말았다. 젠장.


-헤어지다

  3학년이 지나고, 4학년 미혼인 이인숙 선생님이 담임이 되었다. 선생님은 군산이 고향이라고 했다. 3학년도 7반, 4학년도 7반. 경림이와 또 같은 반이 되었다. 역시 신은 내 편이야.


  점점 외울 것들이 많아졌다. 경림이가 이래서 날마다 집에서도 공부한 거였구나. 


  4학년 2학기가 끝나갈 무렵,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다. 장례가 끝난 후 경림이 엄마와 경림이가 우리 집에 와서 어른들에게 인사를 했다.


  5학년이 되면서 남자반 여자반으로 갈렸다. 경림이와 같은 공간에 있지 못하다니. 누가 이런 결정을 내린 걸까? 그는 악마다. 나와 경림이가 함께 있는 것을 싫어하는 악마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왜 지금까지 같이 있게 해 놓고, 헤어지게 하는 거야. 


  반이 갈린 후, 경림이를 자주 보지 못했다. 설상가상 그 해에 내가 전학까지 가게 되었다. 비극의 주인공이 따로 있을까.


-경림아~

  5학년 때 경림이와 헤어졌지만, 언제나 궁금했다. 외할머니댁이 경림이 집 근처라, 1주일에 한 번씩 할머니 댁에 갈 때면, 혹시나 볼 수 있을까 밖을 서성였다.


  그 후 경림이를 한 차례 보았다. 중학교 소풍에서였다. 어느 여자 중학교에서 나무들이 늘씬히 뻗어 있는 공터로 소풍을 왔다. 학부형으로 따라온 탤런트 사미자 씨도 보였다. 그곳에서 지나가는 경림이를 보았다. 경림이가 맞는지 헛것을 본 것인지 내가 나를 믿지 못했다. 


  또 부끄러워 얼굴만 빨개졌다. 이상하게도 내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달려가서 손이라도 덥석 잡고, 울기라도 해야 하는데... 경림이는 어느덧 사라져 버렸다. 


  용기 없는 자가 미인을 잃는다.



<영탁&이용 - 사랑과 행복 그리고 이별>

이별이란

빨간 눈물의 꽃이 하나 둘 피는 것.

하얀 믿음의 꽃이 하나 둘 지는 것.

나의 가슴이 온통 무너져 가는 것.


https://youtu.be/bvAQqQPzh2E

영탁&이용 - 사랑과 행복 그리고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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