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검색을 하다 <5가지 사랑의 언어>를 읽어보려 도서관으로 향했다. 솔직 담백한 속마음을 익살스럽게 표현한 <일개미 자서전>은 다 읽지 못하고, <하나님의 5가지 사랑의 언어>와 맞바꿨다. 대출 가능한 7권이 꽉 차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빌린 책 제목은 '하나님의'라는 말이 추가로 붙어있었고, '인정하는 말 · 함께하는 시간 · 선물 · 봉사 · 스킨십'이란 부제가 달려 있었다. 5가지 사랑 중 나는 무엇을 중시하고 있는지.
성장기에 나는 어떤 사랑을 받았을까. 스킨십이었을까. 이모들이 나와 손잡고 다녔고, 내 얼굴을 씻겨 주었으니. 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느냐고 칭찬해 주는 말이었을까. 이모와 옆에 누워있던 시간이었을까. 매년 받았던 검은 털 벙어리장갑 선물이었을까.
-용산청과물 시장
국민학교 3학년. 학교에서 집에 가는 방법은 2가지. 하나는 그냥 기역자를 아래부터 써 올리듯, 원효로를 타고 여의도 쪽 원효대교로 직진한 후 왼쪽으로 꺾어 가는 것이다. 이 경우는 왼쪽 회색의 핏기 없는 블록 담이 줄지어 있어 볼 게 없고 지루했다.
다른 경우는 용산청과물시장으로 들어가 시장을 구경하며 천천히 꾸불꾸불 가는 방법이다.
용산청과물시장은 1983년 10월 가락동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원효로에 자리하고 있었다. 용산청과물시장의 넓이는 3만 평이나 되었고, 11월 김장철엔 하루 2천 톤의 채소가 3백50여 대의 트럭에 실려 들어왔다. [1]
겨우살이 준비 철로 분주한 시기. 담배를 이빨로 문 상인들은 트럭에서 쉴 새 없이 배추를 아래로 던졌고, 아우성 속에 떨어져 나간 잎사귀들은 차바퀴와 사람들에게 짓밟혔다. 짓이겨진 채소는 미끈거렸고, 초록물 쓰레기 덩어리가 되었다. 해가 떠올라 낮 기온이 오르면 빨리 부패해 악취가 코를 자극했다. 질척이는 길바닥은 1km 끝까지 이어졌다. 공용의 공간이었기 때문에 나서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쓰레기 장이었다. [2]
-쑥대밭은 언제 시작되는 거야
이런 길에 잘 못 들어서면, 발 디딜 곳이 없어 머리에서 열이 났다. 왼발을 딛고 오른발을 올린 다음에는 어디를 밟을지 자꾸자꾸 봐야 했다. 여기서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이 왔다. 이 길을 택한 것이 후회됐다.
질퍽한 녹색 쑥대밭으로 돌변하는 때가 언제 시작될지 몰라 긴팔 옷을 입는 가을이 되면 시장 길로 가다 안 가다 했다.
그날 나는 반팔, 반바지 차림이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청소를 하고 나니, 경림이는 집에 가고 없었다. 엄마에게서 받은 편도 버스비 10원이 잘 있는지 확인하고 용산청과시장 길로 출발했다.
한 여름 태양은 이글거렸고, 자외선이 눈을 찔러 눈을 뜨기 힘들었다. 인상을 쓰며 걸었다. 체온을 내리려 땀을 조금 냈다. 나는 땀이 잘 나지 않는 체질이었지만, 목은 탔다. 10원은 이럴 때 쓸려고 했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그냥 사이다를 먹고 싶었다. 목마르다는 것은 핑계였다.
빙수 아저씨는 어디 있을까?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아저씨가 안 보이면 여기저기 찾아다닐 심산이었다. 차가운 얼음물이 넘실대는 투명 빙수 통을 실은 자전거가 보였다. 나는 얼른 달려가 동전을 내밀었다. 아저씨가 얇은 투명 호스를 아래로 내래자 시원한 사이다가 흘러나왔다. 거품 소리를 쏴악 내며 사이다 한 컵이 채워졌다.
사이다 물 표면에서는 이산화탄소가 숨을 쉬어 댔다. 기포 방울들이 소리 내며 마구 터졌다. 칠성사이다 맛은 아니었다. 차가운 아저씨표 사이다에선 달콤한 향내가 났다.
-오이 마사지할래?
혀 위 사이다는 입안 여기저기 따끔한 거품을 폭파시키는 소음을 냈다. 냉 사이다는 목구멍을 타고 아래로 향했다. 내려가는 길을 새로 뚫으며 지나갔다. 잠시 후 꺼억~. 입과 코로 바람이 폭 쏟아져 나왔다. 코가 맵고 눈이 동그래지면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걸으면, 불룩해진 배 속 물들이 출렁거렸다. 신흥상회 · 대덕상사 · 신일상회 등 간판과 채소 과일을 보며 걸었다. 짐 실은 트럭, 삼륜차들이 오면 한쪽으로 피해 걸었다. 강렬한 햇빛은 제일 약한 눈을 계속 찔러댔다. 남들도 눈 뜨기가 힘들까. 나만 이럴까. 실눈을 뜨고 걸었다.
한 낮 가시광선을 동반한 자외선은 가시처럼 등짝을 뜨겁게 찔러댔다. 검은 머리칼도 뜨끈뜨끈, 얼굴은 노릇노릇 알맞게 구워졌다. 그래서 그런지 내 얼굴은 까무잡잡했다.
걷다가 걷다가 얼굴이 벌겋게 된 그날, 외할머니댁에 들렸다. 내 얼굴을 본 경미 이모는 내게 물었다.
"오이 마사지할래?"
"네? 오이 마사지요?"
"얼굴 씻고 여기 누워봐"
"네~"
-눈을 감았다
이모는 아이스박스에서 꺼낸 오이를 얇게 썰어 접시에 올렸다. 오이 냄새가 났다. 잘린 곳으로 2E,6Z-논아디에날(2E,6Z-Nonadienal)이란 화학물질이 오이향을 만들어냈다. 오이 물기에 묻은 향기는 방안 공기 속으로 스멀스멀 퍼져 나왔다.
오이김치에서 맡을 수 없었던 오이 냄새가 진하게 났다. 오이향은 방안에 서서히 깔리고, 움직일 때마다 코를 통과해 은은했다. 이모가 차가운 오이를 내 얼굴에 올려놓자 숨이 약간 가빠지고 심장 고동이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길게 공기를 빨아들였다.
차가운 오이가 얼굴에 닿았다. 상체가 움찔했다. 코는 얼굴 위 초록 향기를 감지했다. 내 얼굴에 차가운 살결을 갖다 댄 오이는 자신의 체취를 나에게 전했고, 나는 그 냄새를 기억에 담고 있었다.
할머니 댁은 시민아파트 2층이었고, 형광등이 꺼진 방안은 적당히 어둡고 알맞게 밝았다. 얼굴에 오이를 얹은 채 이모와 나는 나란히 누웠다. 나는 눈을 감았다.
-오이향은 누가 만들었을까
오이향은 젊은 이모의 피부에서 나는 걸까. 이모가 만들어낸 이모의 향기일까. 생 오이를 그냥 잘라먹기도 했지만, 그땐 향기를 잘 몰랐지. 부러뜨려 먹는 오이는 '먹는 오이 냄새' 뿐이었어. 오이김치는 젓갈, 마늘 등 양념이 배인 김치 냄새뿐이었는데. 지금은 진짜 오이향이 나는 거잖아. 오이에서 오이향이 나네.
오이향은 어쩌면 이렇게 시원할까. 누가 이런 향기를 만들어냈을까. 오이가 내 얼굴을 부비고 있어 간질간질하지만, 초록으로 맑은 오이향에 상쾌하고 마음이 가벼워.
내 마음은 오이 길을 걸었다.
시원함이 산들거리는 길을 걸었다.
오이향은 초록색이었다.
고요한 초록빛 향기야 천천히 쉬엄쉬엄 가자.
내 손 잡고 가자.
얼굴에 시원한 팩을 하는 오이마사지. 얇고 차가웠던 오이 원반은 열교환 끝에 내 체온이 되었다. 신선한 오이향도 익숙해져 옅어져 갔다. 영원한 건 정말 없는 걸까.
-향기와 기억을 재생할 수 있을까
국민학교 시절 그 오이향을 다시 느껴볼 수 있을까. 냉장고에서 며칠 된 오이를 꺼내 썰어 냄새를 맡아보고, 얼굴에 올려놓았다. 얼굴에서 두껍게 썬 오이 무게가 느껴졌다. 오이향은 짙지 않고, 약간 어색한 냄새가 났다. 콧 속으로 더욱 많이, 오이 바람을 넣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