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추웠고, 밥알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도 않았다. 가방은 천근만근(千斤萬斤). 도중에 오(吳)만근을 만났다. 중학생처럼 이부 깍아머리를 한 녀석은 성큼성큼 걸었다. 오늘날 에너자이저 같았다. 그를 생각하면 "백만 스물하나, 백만 스물둘!" 하는 소리가 들릴 듯하다.
뒤를 따랐지만 점점 멀어져 그 애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발을 질질 끌면서 갔다. 뒤에서 당기는 힘과 싸우며 학교로 향했다.
중부지방 모내기 철은 몇 월인가라는 문제가 나왔다. 괄호에 '6월'이라고 바드시 적었다. 바드시는 '힘겹게 겨우'라는 뜻을 가진 우리 집 사투리다. 몸이 아프니 생각하는 것이 고역이었다. 논산 들꽃뫼 고모댁에 모가 심겼던 것이 6월인 것 같았다.
모든 것이 귀찮았다.
요통이 왜 왔는지 그때는 몰랐다. 공사판에서 노동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아픈 것일까? 그 이후로 허리가 아플 때면 온몸이 함께 아팠다. 사지(四肢)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봄가을 환절기엔 으레 아팠다. 40년 동안 지속 되었다. 봄이면 추웠고, 한기가 파고들면 여지없이 몸살이 뚫고 나왔다. 스산한 가을바람이 살짝 피부를 스쳐도 위가 탈 나고 몸살이 휘몰아쳤다.
2. 잔인한 4월엔 봄옷만으론 안되었다
몸살이 나면 제일 먼저 위가 경보음을 냈다. 속에서 음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위에 뭐가 무겁게 매달렸고 통증이 온몸을 늘씬 밟아 짓이겨댔다. 근본 원인은 약한 위장에 있었다.
6학년 발야구를 하는 봄날에도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하늘은 맑았지만 내 몸은 겨울이었고 뻣뻣했다. 누가 봄을 따뜻하다 했는가. 나의 봄은 항상 추웠다. 군대에서도 내의를 벗은 삼 사월이 가장 추웠다. 겨우내 입던 내복을 벗어던지고 다른 애들처럼 봄옷을 걸쳤지만 나는 아직 겨울이었다.
아침 기온이 떨어진 날, 전날 옷차림 그대로 등교하면 하루 종일 덜덜 떨었다. 몸을 오그린 날은 위가 삐그덕 거리며 고장 났다. 소화장애로 이어지다 몸살이 출현했다. 수십 년 동안 이런 몸을 인지하지 못했다.
내게 '4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북한 김일성의 생일이 4월에 있다는 것. 정말 싫었다.
둘째, 4월은 너무 춥다는 것. 그래서 꼭 몸살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
셋째, 이런 4월에 내 생일이 있다는 것.
3. 고춧가루 콩나물국
계절이 바뀌면 옷차림을 바꾸어야 한다.
남들을 따라 무조건 봄옷으로 바꾸어야 한다. 한 번 가벼워진 옷을 걸치면 줄곧 그런 옷을 입었다. 관성이었다. 내 몸엔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냥 불문율에 따를 뿐. 주변 옷차림에 나를 맞췄다. 긴 옷이면 긴 옷, 반팔이면 반팔. 날씨가 요동을 쳐도 얇아진 봄옷으로 쭉 달렸다.
요즘에는 날씨 앱을 이용해서 20도를 넘는지 아닌지에 따라 보온 전략을 짜지만, 예전엔 변화무쌍한 온도에 대해 무관심했다. 그래서 자주 몸살이 났다.
결혼 후, 몸살이 나면 콩나물국을 달라고 했다. 고춧가루를 넣은 콩나물국이라도 겨우 먹으면, 겨울 내의를 입고 양말을 신었다. 이불 2개로 얼굴까지 싸맸다. 땀이 안 나면 파카를 덧입고 드라이기를 돌렸다. 목에서 땀이 주르륵 흐르고 온몸이 찐득찐득해지면, 안심하면서 축축한 내의를 빨래통에 넣었다. 그렇게 하루나 이틀을 앓고 나면 입맛이 돌았다.
40대가 되어도 여전히 몸살에 시달렸다. 봄날 이비인후과에서 몸살약을 지은 날. 몸살 날 때 땀을 흘리면, 입맛이 돌아오고 낫는다고 내 경험을 말했다. 의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간호사와 묘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몸살에 땀을 흘려 낫는다는 황당한 말은 처음 들었다며, 오히려 나를 비웃었다.
그런 말을 처음 들었다니, 나는 의사를 의심했다. 상식도 없이 의사를 하고 있네 했다.
4. 복부통증 때문에 제산제를 먹어야 했다
그 후 매일새벽, 우측 상복부가 아파왔다. 꿈속에서 고민하다 잠을 깼다.
우측 상복부는 젖가슴 부근부터 시작되는 간 위치와 겹치는데, 혹시 간이 아플까. 아니야 간은 워낙 둔한 장기여서 통증을 모른다잖아. 간이 아플 정도면 황달이 벌써 왔거나 피검사에서 신호가 왔겠지. 그럼 뭐가 아픈 거야.
간의 위치 - MSD 매뉴얼
공사장 철근 다발이 배를 꾸욱 눌러대는 통증에 눈을 뜨면, 여지없이 4시였다. 며칠 참다가 박내과를 찾았다. 몇 년 전 역류성식도염 의심 진단을 받았다고 내 상태를 알렸다. 의사는 청진기로 들어보고, 배를 누르고 톡톡 두드렸다. 그리곤 말없이 약을 처방했다.
약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제산제 / 위산분비 억제제 / 항염증 및 소화제였다. 의사는 역류성식도염이란 내 말을 믿고 약을 처방해 준 것 같았다.
첫째, 알마겔 겔포스 등 일반 제산제. 위액 염산을 중화시키는 알칼리성 무기물이다. 알루미늄, 마그네슘, 칼슘 등을 함유해, 산을 중화한다. 그러나 알루미늄 성분은 몸에 축적 시 신경독성, 빈혈 등을 일으킬 수 있다. [1] 나는 이런 약을 10년 이상 먹었다. 내 신경은 정상인 걸까. 혹시라도 알츠하이머 치매로 진단이 되면, 제산제에 든 알루미늄 때문이라 의심할 수밖에. [2]
둘째, 위산방출 자체를 억제하는 프로톤 펌프 억제제(PPI). 위장 안에서 수소이온(H+, proton)이 염소와 반응하면 위액인 염산이 된다. 이때 수소이온(프로톤)을 위장 내로 방출케 하는 프로톤 펌프효소를 억제하는 약이다. [3] 소화성궤양이나 위식도역류질환에 사용된다. [4] [5]
셋째, 위점막 보호 및 항염증제 [6]그리고 위장관 운동촉진제. [7]
5. 내 병은 내가 고쳐야 한다
이런 약을 15일 이상 먹어야 겨우 진정됐다. 약을 먹으면 나아졌지만 주기적으로 재발했다. 병원 일은 약을 처방해 주는 것. 내 일은 약을 먹는 것. 그리고 재발을 반복하는 사이클.
위를 고쳐야 주기적 몸살도 고칠 수 있다고 결론을 냈다. 내 몸살의 원인은 위(胃)에 있으니까. 『또 하나의 뇌 위장』같이 위장 관련 책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내 몸을 관찰하는 수밖에.
어려서부터 위가 작고 약한 나. 국민학교 입학 전부터, 국민빵이라는 삼립 크림빵 하나를 다 못 먹는 아이라고 낙인찍혀 있었다. [8] 이런 나를 어떻게 살려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