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소설을 다시 써볼까 해서 한동안 내려놓았던 소설책들을 닥치는 대로 골라 잡아 읽고 있는데 유독 눈길을 끄는 작품이 하나 있었다. 길란 소설가의 2025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복 있는 자들」이다(소설 원문 읽기). 제목으로 설정한 "정말 다행이지 않니? 우리가 임대주택에 당첨될 정도로 가난해서"라는 대사는 소설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구절이다.
소설은 평범하게 돈 벌어서는 서울에서 사람답게 살 수 없음을 자각한 주인공이 임대아파트의 자격만 충족하며 최소한의 삶을 설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겉보기엔 가난이 핵심인 것 같지만 나는 이 소설이 질투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서울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운 좋은 사람들(주인공의 표현에 따르면)'을 질투하고, 그녀의 안타고니스트인 류아 언니는 가난이라는 속성 하나로 신축 임대아파트에 들어와 살며 문화생활까지 즐기는 주인공을 질투한다. 주인공들은 각자의 방법론에 대해서 부당함을 느끼고 있지만 결국 그것도 일종의 질투다. 왜냐하면 두 사람 모두 내가 갖고 싶은 걸 남이 갖게 내버려 두지 않을 심산이기 때문이다.
내가 봉준호 영화에서 발견하는 진흙탕 같은 면모를 좋아하듯 이 소설도 우아한 종교적 의식 아래 지저분한 인간의 속내를 난장판처럼 펼쳐놓는다. 주인공이 사는 임대아파트 사람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주변 이웃들과 관리사무소 직원, 언니 동생하며 지내지만 은근 급 낮은 인간으로 시선을 내려 깔고 있는 류아 언니까지 모든 것이 길 가다 한 번쯤 본 것처럼 선연하게 그려진다. 개구리처럼 수영하는 주인공이 개구리를 혐오하고, 개구리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타자에게 개구리 소리를 이식하려는 청개구리 같은 반항심도 퍽 마음에 든다. 좁은 세상에서의 우위를 만족스럽게 탐식하며 서로를 질투하는 세계의 이야기는 소설보다는 르포 형식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패닉 바잉으로 영끌해 버린 영끌족을 교묘히 조롱하면서도 수중에 100만 원이 없어 엄마 암수술비조차 내지 못하는 절박함을 주인공에게 병치시켜 놓은 것도 이 소설의 탁월한 아이러니이자 딜레마존이라고 할 수 있다. 뭐가 해결되는 것은 없고 옳은 것도 없다. 그저 다 현실일 뿐이며, 그 속에서 삶을 해석하려는 인물들이 각자의 방식을 고수하기 위해 악을 쓰는 것만이 소설을 지배하고 있다.
EBS 다큐멘터리 <도시예찬>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왜 도시에 몰려사는지에 대한 분석이 나온다. 소수의 사람이 모여서는 도저히 달성할 수 없는 거대한 인프라를 도시는 비교적 평등하게 누리게 해 준다
한데 제목이 '복 있는 자들'이다. 소설은 극심한 빈부격차로 부의 축적을 포기해 버린 주인공의 기형적 가난에 대해서 다루고 있지만 실은 자격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질투도 질투할 대상이 있어야 비로소 피어나는 법. 특정한 삶의 양식을 차지하려는 욕망은 빈부를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야 인간답게 사는 것일까? 이 질문에 도달하면 한 가지 이상한 점도 포착된다.
소설 속 주인공과 류아 언니는 모두 서로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지만 두 사람 다 이상하리만치 서울에서의 삶을 추구하고 있다. 끔찍한 집값도 수도권의 이야기지 지역에서 적당한 구축에 수리된 집은 2억 원도 채 하지 않는다. 이 정도라면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언니를 보며 조롱했던 '100만 원 모아서 어떻게 집을 사'를 가능케 하지 않을까? 하지만 같은 복지를 누릴 수 있다 해도 주인공은 강원도나 울산 같은 지방에 내려가 살지는 않을 게 분명하다.
힌트는 소설 초반부에 묘사되는 주인공의 시선에 있다. 대리석이 장식되고 홈화면에서 엘리베이터를 부를 수도 있는 좋은 집, 정원이 보이고 문화가 가득한 서울. 주거급여를 맞추기 위한 일자리를 '정밀하게' 구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풍부한 일자리. 임대주택에 당첨되어 다행인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평생을 살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인 것이다. 서울을 장식하고 있는 온갖 인프라는 부자와 빈자를 가리지 않고 문을 열고 있다. 서울에서의 삶이 고되어도 수도권 거주자가 되어 그 인프라를 누릴 자격을 갖는 것은 의미가 분명 다르다. 똑같이 가난해도 지하철을 탈 수 있는 서울과 지하철이 없는 울산에서의 삶은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진정 가난한 사람에겐 선택이랄 게 없었겠지만 말이다.
덧붙여 인간 자격이 갖고 싶으니까 결말부의 주인공은 임대 아파트 사람들을 차별하는 사람들에게도 적개심을 가지며, 자신이 편법을 쓴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옳은 행위였음을 끊임없이 합리화한다. 사람답게 사는 것에 이어서 인격적인 존중도 함께 가져가려고 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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