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커피와 토스트

- 그것들의 가르침

by 피터팬의 숲

산새들의 지저귐이 울려 퍼지는 조용한 주말 아침, 나는 얼마 전에 사둔 시집을 펼쳐 들었다. 시집을 한 장 한 장 넘겨보고 있는데, 얇은 내지가 오늘따라 거칠게 느껴진다. 손 소독제를 너무 많이 바른 탓이겠거니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긴다. 시 몇 편 음미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주말의 시간을 만끽하자고 다짐한다. 커피 테이블에 커피 한 잔과 갓 구운 토스트를 올려 두고 풍겨오는 아침의 향취를 함께 들이마신다.

그윽한 향의 커피와 부드러운 맛의 토스트는 반 이상 줄었는데, 읽고 있는 시의 단어와 구절이 머릿속에 맺히지 않는다. 반복해서 읽어보지만 마찬가지다. ‘쇼미더머니’에 출연한 어떤 참가자가 달달 외워온 랩을 읊조리는데 마침 반주가 엇박자라 심사위원들이 현기증을 느끼는 것처럼, 내가 읽고 있는 게 시가 아니라 ‘딴 나라 문자’처럼 느껴진다. 아무런 심상을 담아내지 못하는 시가 존재할 수 없다. 이건 분명 나 자신의 문제임을 확신한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잠시 눈을 감아본다. 정신을 집중하고 싶은데 잘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입시 준비생들 사이에 엠씨스퀘어가 한창 유행하던 시절에도 나는 누군가 선물해준 그 검정 기계를 양 귀에 살짝 걸쳐만 봤을 뿐 별 필요가 없었을 정도로 집중력은 강한 편이었다. 할 수 있다고 주문을 외우고 단전에 기를 모아 본다. ‘또로록!’ 머릿속인지 마음속인지 모를 어딘가에서 ‘시 난독’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지는 소리가 들렸다. 빙고.

잠깐의 명상으로 시의 호흡보다 내 호흡이 빠르기 때문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호흡이 빠른 이유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이고 여유가 없으니 시가 제대로 내게 다가올 리가 없다. 여유가 없으면 좋은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특히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 만들어지는 결과물에는 조급함이 묻어있다.

예를 들어 학교나 회사에서 누군가에게 쫓기듯 완성한 리포트나 기획안은 참신함이 없고 모방의 흔적만 가득하다. 집에서 외출시간을 30분 남기고 하는 설거지는 1시간 전에 하는 그것보다, 그릇에서 ‘뽀드득’ 소리가 덜 난다. 오늘 시가 읽히지 않는 것은 풍요 속의 빈곤 때문이며 마음속 빈 수레가 덜커덩 소리를 너무나 쉽게 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내가 시를 좋아하게 된 것은 대학교 신입생 시절에 류시화 시인의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이라는 시집을 읽으면서부터다. ‘속눈썹’이라는 시를 읽다가 ‘너의 긴 속눈썹이 되고 싶어 / 그 눈으로 너와 함께 / 세상을 바라보고 싶어’라는 구절을 읽고 밤잠을 못 이뤘다. 그 당시 잘 보이고 싶던 어떤 여자 친구에게 이 시의 내용을 들려주면 어떤 반응이 올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MSN’이라는 한때 잘 나가던 메신저의 제목을 이 내용으로 바꿨다. 다음날 같은 과 친구들이 “어이 음유시인!”이라며 놀려댄다. 듣기에 좋았기에 바꾼 메신저 제목은 몇 달간 그대로 뒀다. 하지만 관심 있던 여자 친구에게는 들려주거나, 그 내용을 어딘가에 써서 줄 생각은 하지 않게 됐다. 이렇게 시에 대한 재밌는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는 내가, 잠시나마 시를 음미하지 못할 정도로 숨이 가쁘게 살고 있다니. 아침에 잘 먹혔던 커피와 토스트가 그리고 잘 읽히지 않았던 시가 함께 알려준 깨달음에 대해 다시 곱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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