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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팬의 숲 May 19. 2021

염탐(廉探) 2

1호가 될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 책방을 좋아하겠어

 석가탄신일을 맞아 특별히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우리 동네 독립서점을 찾았다.

     

 “어서 오세요.” 서점 주인이 반갑게 맞아줬다. ‘제가 인별그램에서 당신 서점의 일거수일투족을 매일 지켜보고 있는, 이 동네에 가장 먼저 서점을 내고 싶었던 바로 그 사람이랍니다. 동네 1호 서점 자리를 빼앗겨서 얼마나 아쉬운지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나름의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서점 안으로 입장했다.

      

 내가 있는 곳에는 대부분 언제나 아내가 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나와 아내는 서로가 아내일 수도, 남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아내와 함께 서점에 들어가 재빠르게 좌우를 흘겨봤다. 4단짜리 앞과 뒤가 뚫린 긴 책장이 오른쪽 벽면을 책과 함께 채우고 있었고 반대편 벽면에는 큼직한 어린이 그림책들이 오밀조밀 자리하고 있었다. 가운데에는 낮은 테이블이 있었는데, 책들이 표지가 잘 보이게끔 전시되어 있었다. 책방의 크기가 크지 않아서 전체적인 분위기가 사진에서 보던 것만큼 아기자기했다. 내가 서 있던 공간에서 책방 주인의 데스크까지 어른 보폭으로 두 발짝 정도이니 우리가 나누는 대화마저도 소리를 낮추지 않으면 책방 주인의 귀에 쉽게 들어갈 것 같아 조심스러웠다. 나는 아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마음에 드는 책 골라봐. 신선한 책으로.”

     

 동네 서점이라면 무엇보다 책방 주인의 가치관과 관심사를 엿볼 수 있는 것이 매력인 법. 세계문학 단편선과 <코스모스>, <클라라와 태양> 같은 대형서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책들이 보였고, 여행에 관한 책, 페미니즘을 다룬 책도 보였다. 채식주의를 다룬 책과 동물과 식물과 함께 사는 법, 또 글쓰기와 관련된 큐레이션에서는 서점 주인의 취향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서점 일기>,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 같은 책이 있어서 반가웠다. 이런 책들은 서점 운영과 ‘책’이라는 물건 자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소유하고 싶고, 읽어보고 싶은 그런 책이다.

      

 이 서점 주인도 이 책을 읽으며,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겠구나. <서점 일기>의 저자 ‘숀 비텔’처럼 설마 책을 너무 좋아해 ‘인간 혐오’에 빠진 건 아니겠지. 이런 생각이 들자, 서점 주인의 얼굴이 한 번 더 보고 싶어 졌다. 아까 서점에 들어올 때 슬쩍 봤지만, 조심스럽게 책을 보는 척하며 서점 주인을 바라봤다. 그녀는 뮬란의 여주인공이 생각나는 눈을 가졌다. 마스크로 얼굴 대부분을 가려서 관상을 볼 수는 없었지만, 서점을 하기에 적합한 관상을 가진 것으로 혼자 평가해본다. 합격! 내가 합격을 외친다 한들 아무 의미가 없지만 적어도 내 마음속에서는 이 서점의 큐레이션이 꽤 괜찮고, 동네 1호 독립서점의 자리를 내어 줄 만하다며 ‘아쉬운 대로 인정함’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줬다. 그리고 서점 주인장을 ‘포카혼타스’라고 칭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내와 서점에 들어간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대여섯 명 손님들이 들어왔다. 아무래도 서점 주인이 동네에서 알게 된 사람들인 것 같았다. 주인과 스스럼없이 평범한 대화를 이어갔다. 나와 아내, 방금 입장한 손님들로 인해 작은 서점이 갑자기 복잡해졌다. 하지만 조용했던 서점 안의 공기가 따뜻해졌다. 왠지 모르게 기뻤다. 서점 운영을 언젠가 하게 된다면, 내가 바라던 그런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큰 부담 없이 찾아와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책이 좋은지 읽을만한지 서점 주인에게 추천을 부탁하고, 어제 사간 책이 인생 책이었다는 류의 평범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반짝반짝 빛날 수도 있는 이야기들. 지금은 서점을 내기 위한 내공을 더 쌓고 서점 운영 자금을 모으는 중이지만, 그런 모습들이 내 눈 앞에 펼쳐지다니.

     

 잠깐의 감상에 잠겼지만, 아내와 20여 분의 책 ‘여행’ 중에 신중하게 고른 책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나는 여기에 연설하러 오지 않았다>였다. 회사에서 대외 원고 작성에 필요한 필력을 더욱 기르라는 ‘주문’이 있었기도 했고, 꼭 회사가 아니더라도 글을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글을 잘 쓰는 것만큼 가성비 있게 쓸모 있는 것도 없다.)

      

 “이 책 정말 좋은 책이에요.” 포카혼타스 주인장이 우리가 고른 책을 보고 말했다. “네. 글을 잘 쓰고 싶기도 해서요.” 내가 말했다.

      

 “혹시 글 쓰는 직업을 가지셨어요? 아니면 취미로?” 그녀가 호기심이 동했는지 내게 말을 걸었다. “아니요. 취미로 글 쓰는데, 언젠가 제가 만든 책을 꼭 내고 싶네요.” 썩 맘에 드는 답변은 아니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와. 책 내게 되면 저희 책방에 먼저 입고해주세요.”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입고되기만 하면야 너무나 좋겠죠. 우선 책을 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원고를 쓰는 게 중요할 것 같네요.’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장강명 작가의 <책 한번 써봅시다>라는 책에는, 한 주제로 200자 원고지 600장을 쓰면 된다고 하는데 이 정도의 원고를 마련하려면 주말에는 카페에서 노트북을 켜고 여름에 엉덩이가 축축해질 정도로 키보드를 두드려야 하겠지.

      

 서점에서 나와 아내와 함께 집까지 걸어왔는데, 책을 내게 되면 입고 부탁한다는 말이 뇌리를 계속 맴돌았다. 이 또한 동네 서점이 가진 매력이 아닐까. 대형서점에서는 손님이 구매한 책에 대해 계산원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는다. 단지 주차권 필요하시냐고 기계적으로 물을 뿐.

     

 아무래도 동네에 오픈한 서점을 향한 염탐이 책을 내고, 언젠가 서점을 운영하고 싶다는 내 마음속의 불을 지핀 듯하다. 포카혼타스 주인장에게 감사한 하루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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