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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팬의 숲 May 14. 2021

염탐(廉探)

우리동네에 책방이 들어왔다

‘4월 중 동네 책방 오픈 예정’ 

     

 아내와 산책을 나섰다. 동네 상가에 현수막이 반갑게 걸린 걸 발견한 날은, 간질거리는 햇볕이 내리쬐는 4월의 나른한 오후였다. 상권이 형성되는 입구 초입 1층에 자리한 몇 평 되지 않은 규모의 공간을 누군가 책방을 하겠다며 계약한 모양이었다.      


 열 자 남짓한 현수막의 담백한 글귀가 이유 없이 내 마음을 끌었다. 얼마 전 연 꽃집이 얼마나 화려하게 그 시작을 알리는 현수막을 걸었는지 떠올렸다. 담담해 보이는 현수막이, 서점 주인의 간결함을 은은하게 비춰주는 듯했다. 머릿속에서 상상의 실타래를 이어나가자 갑자기 서점 주인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여보, 우리 동네에 책방 들어오는데?” 아내가 내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회사에서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마주한 날에는, 동료들과 술로 회포를 푸는 대신 “언젠가 집 근처에 서점을 내고 말겠다”며 아내에게 서점을 향한 내 각오가 꽤 단단하다며 팔짱을 끼고 일장연설을 하곤 했다. 나는 서점을 경영할 미래의 위인이니, 지금 이런 수모 따위는 견뎌야 한다면서,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숲세권이라는 멋진 주변 경관은 이 동네에 책방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좋은 핑곗거리였다. 좌우로 뻥 뚫린 하늘과 산, 푸른 숲과 나무, 들꽃이 어우러진 맑은 풍광을 서점 안에서 바라보는 상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지친 심신을 정화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지금 이 서점의 주인은 집 근처에 책방을 열겠다는 포부를 아내에게 말로만 선언하던 나보다 결단력과 실행력이 뛰어남이 틀림이 없었다. 누군가는 꿈을 상상으로만 이룰 때, 누군가는 머릿속에만 그리던 꿈을 눈앞에 떡하니 세워뒀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심지어 내 자리를 뺏겼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저 서점은 내 것이어야 했다는 듯이.     


 서점을 운영하려면 여유 자금이 있어야 한다고 늘 생각해왔다. 월세로 매달 운영비를 충당하려면 마음 편히 서점의 일을 할 수가 없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상가를 매매할 정도의 충분한 자금을 확보한 이후 서점을 시작하겠다는 내 계획이 조금이라도 젊은 나이에 서점을 시작할 가능성을 줄이고 있지만, 이런 그럴듯한 이유는 매일 아침 지옥철을 견디며 출근하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한다.      


 서점이 들어선다는 현수막을 본 지 보름이 지났다. 그날도 아내와 산책하는 중이었는데, 드디어 가게 안을 정리하는 서점 주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랜드’ 오픈을 며칠 남겨두지 않아서인지, 책 정리에 한창인 모습이었다. 저녁 어스름이 짙어지는 시각이라 가게 안은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서점 주인은 탁상용 조명을 켜더니 어둠 속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가 어떤 책을 옮기는지, 어떤 책을 가졌는지 궁금해진 나는 통창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그러자, 내 그림자를 본 서점 주인은 화들짝 놀랐는지 계산대가 있는 가운데 책상 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생각보다 수줍음이 많은 사람인 것 같았다.  


 그날 한 가지 수확이 있다면 통 창 옆에 새겨진 서점 인별그램의 주소를 적어온 것이었다. 인별그램에 들어가 보니 ‘0000 북스’라는 귀여운 동물 모양의 로고가 보였다.      


 그 서점에 대한 염탐질을 시작한 것은 그 이후부터였다. 어느 날은 인별그램에 책방 오픈을 알리는 사진이 올라왔다. 또 어떤 날은 책방 전경이 담긴 사진이 등장하고, 새로 입고된 책 사진이 나타났다. 사진과 함께 오늘 방문한 손님이 없다며, 서점 주인의 고민을 담은 몇 글자가 둥둥 떠다녔다. 그럴 때면 마치 내가 서점 주인이 된 듯 가슴까지 애잔해졌다.      


 게다가 이 서점은 커피를 팔지 않는 서점이었다. 오로지 책으로만 생존하고 경쟁하겠다는 자신감 또한 마음에 들었다. 최근에 책방 창업에 관한 이야기를 친구와 한 적이 있는데, 친구는 매출을 늘리기 위해서라도 커피는 반드시 같이 팔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서점은 카페인지 서점인지 정체성이 불분명해진다. 책방을 열었는데 매출이 없어 커피에 의존해야 한다면, 그것은 더는 서점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 책만 파는 고지식해 보이는 서점, 동네에 오픈한 이 서점이 유달리 마음을 끄는 또 다른 이유이다. 당분간은 이렇게 염탐질을 계속하자고 마음을 먹는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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