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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규승 Dec 21. 2020

저 멀리 영원히… 영원히…

음악×문예 02 _G. 말러, 〈대지의 노래〉

음악×문예 02

G. 말러, 〈대지의 노래(Das Lied von der Erde)〉


겨울이 왔다. 늦가을의 어느 순간, 겨울은 느닷없이 닥쳐온다. 흔히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에 ‘또는’을 넣어 계절을 겹치곤 한다. 그러나 그 둘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다만 사람들의 계절 감각이 너나없이 다르기에 늦가을과 초겨울을 겹침으로써 계절 감각을 공유케 한다. 겹친 계절을 환절기라 부르지만 이는 계절 감각을 타협해 얻은 허구의 이름일지 모른다. 아직 겨울이 아닌 사람과 벌써 겨울인 사람이 수긍할 수 있는 타협의 시간.


하지만 겨울이 나에게 다가올 때는 환절기를 거쳐 오지 않는다. 사람마다 다를 뿐 겨울은 가을과 섞이지 않는다. 겨울은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고 느낄 수도 있고, 뺨에 닿는 바람의 감촉으로 가늠할 수도 있다. 어떤 이에겐 첫눈이 내려야 비로소 겨울이다. 이때 낙엽과 바람과 눈은 내 안의 계절 감각을 끄집어내어 이제 겨울이야, 하며 눈앞에 펼친다. 이때부터 몸과 마음은 따뜻함을 찾아 움직인다. 귀는 더욱 투명해진 공기가 챙챙 내는 소리를 듣는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에 서린 김을 닦아낼 때, 겨울은 느닷없이 차창 밖 풍경으로 다가와 있다.



살아 있음의 끝, 영원한 소멸


겨울은 돋아난 것들이 떠나는 계절이다. 나무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온몸으로 작별을 표현한다. 새순은 나뭇가지에 쌓인 눈과 작별하고 나뭇잎의 녹색은 연두색과 작별한다. 단풍은 푸르른 날과 작별한다. 마른 나뭇잎이 나뭇가지를 떠날 때 작별은 절정에 이른다. 그리고 앙상한 가지에 다시 눈이 쌓인다.


나뭇잎이 가지를 떠나는 겨울, 이때의 작별은 ‘안녕’이 아니다. ‘또 봐요’는 더더욱 아니다. 인사말도 건넬 수 없이 떨어져 나가는 그 순간은 짧지만, ‘영영’ 떠나는, 소멸의 순간이다. 비록 다음 해 봄, 잎이 진 자리에 새순이 돋지만 낙엽이 소생하는 것은 아니므로. 때로는 오래된, 뻔한, 아는 이야기이더라도 영원한 이별 앞에서는 사람들은 온전히 감정의 화신이 된다. 그래서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는 여전히 많은 사람의 마음속 가야금을 울리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도 낙엽과 별반 다르지 않다. 숱하게 이별하며 살아가는 것이야 생의 비유이려니 할 수 있지만 죽음을 맞은 몸은 정말 낙엽과 닮았다. 아버지의 주검이 그러했다. 영화나 드라마의 장면과는 달리, 내게 전해지는 이별의 말은 없었다. 이미 말을 잃고 정신을 잃고 몸속의 움직임만이 의료기에 숫자와 그래프로 표시될 뿐이었다. 그 표시마저 사라진 순간, 아버지의 몸은 점점 낮아졌다. 낙엽의 색깔과 닮아갈 뿐만 아니라 몸의 굴곡마저 사라졌다. 금방이라도 바스락거리며 부서질 것 같아 떠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물끄러미 서서 한동안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 순간에는 한 방울의 슬픔도 올라오지 않았다.


슬픔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작별하는 순간에나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영영 사그라지는 몸 앞에서 어줍게도 나는 ‘소멸’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결국 내 슬픔은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다녔던 강변도로 어느 길 위에서 터지고 말았다. 뒷좌석에 앉아 강물을 내다보고 계신 아버지가 저녁 햇살을 온몸으로 받은 채 나와 작별하고 있었다. 그때 강물 위에는 찬 기운이 스멀스멀 퍼지고 있었고, 길게 꼬리를 물고 늘어선 차량들이 흐릿해졌다. 그해 겨울은 그렇게 느지막이 찾아왔다.


아버지를 감쌌던 그날 오후의 햇살은 짙은 갈색이었다. 사라지는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색과 빛으로 더해진다. 여기에 슬픔이 입히면 아름다움은 더 짙어진다. 앙상해져가는 늦가을의 온갖 풍경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사라져가는 것들의 강렬한 이미지가 빛과 색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의 시간은 짧다. 슬픔도 아름다움도 익숙해지면 별것 아니기 마련이다. 그래서 겨울은 풍성했던 지난날을 떠올리게 하고 소멸의 아름다움을 완성해간다.



세기말,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9번 징크스


말러의 〈대지의 노래〉는 소멸의 순간을 아름다운 선율로 들려준다. 그러나 그 선율은 단선적이지 않고 복합적이다. 여러 선율이 얽혀 아름다운 이미지를 엮어간다. 말러의 관현악곡이 대부분 그렇지만 이 곡 역시 인내심을 필요로 할 정도로 긴 편이다. 하지만 겨울에 대한 어떤 이미지나 경험을 갖고 이 곡을 들으면 그 이미지에 깊은 색을 칠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섯 악장 중에서도 6악장이 이 곡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이미지를 규정한다. 그래서 그런지 길이도 여섯 악장 중 제일 길다. 호른과 콘트라파곳의 저음과 탐탐의 울림은 그저 악기 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그 사이를 가르고 오보에는 죽음을 알리는 새소리를 연주한다. 죽음의 메타포는 여러 악기의 선율들이 합쳐져 숲을 이룬다. 거기에 ‘작별’의 노래가 흐른다.


  그는 말에서 내리고

  작별의 잔을 건네준다.

  그가 묻는다 어디로 가는지,

  왜 그래야만 하는지를.

  그가 흐릿한 목소리로 말하길

  그대, 나의 벗이여,

  세상은 내게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네!

  

  내가 어디에 가느냐고? 나는 간다네, 산속을 방황한다네.

  내 고독한 마음이 쉴 곳을 찾는다네.

  나는 내 고향, 내 집으로 돌아가노니,

  결코 머나먼 곳을 방황하지 않으리.

  내 마음은 고요하고 때를 기다리노라!

  사랑스러운 대지는 봄을 맞아

  도처에 꽃을 피우고 초록빛으로 단장하니

  저 멀리 곳곳마다 영원히 파랗게 빛나는도다!

  영원히… 영원히…

  ―‘작별’, 〈대지의 노래〉 6악장

  김문경, 『구스타프 말러Ⅲ: 대지의 노래』, 밀물, 2006. 


말러가 스스로 밝혔듯이 〈대지의 노래〉는 그의 곡 중에서 가장 개인적인 작품이다. 장녀의 죽음과 빈 궁정 오페라극장 감독직 사임, 그리고 자신의 심장병 진단 등이 이 곡을 만들기 전에 일어났다. 이런 일들이 곡을 쓰게 된 원인은 아닐지라도 삶이 확장되어가는 시기가 아니라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시기, 자신의 생이 늦가을을 맞았음을 자각하는 계기는 되었을 것이다. 말러가 이 곡을 쓴 계절은 여름이지만 어느 누구라도 이 곡에서 여름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는 못할 것이다. 실재의 계절 감각보다는 삶의 계절 감각이 곡의 분위기에 강렬히 작용했기 때문이다.


일설에 의하면 말러는 ‘9번 교향곡 징크스’를 심하게 의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대지의 노래〉는 그의 아홉 번째 교향곡이지만 9번 교향곡은 아니다. 그는 9번이란 번호를 붙이지 않음으로써 자신에게 닥친 죽음의 그림자를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염원 때문인지 그는 열 번째이지만 9번인 교향곡을 완성하고 10번 교향곡을 작곡하게 된다. 하지만 10번 교향곡을 쓰는 도중 그렇게 피하고 싶었던 죽음을 맞이했고, 10번 교향곡을 미완성으로 남긴다. 결국 그는 9번 교향곡이 그의 마지막 교향곡이 되는 ‘9번 징크스’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말러의 번호 없는 교향곡, 교향곡이라 부르지 못하는 교향곡인 〈대지의 노래〉에는 이백, 맹호연, 왕유 등 중국의 한시가 노랫말로 들어간다. 재미있는 점은 이 곡을 완성하는 데 많은 부분을 제공한 중국의 당시(唐詩), 그중에서도 왕유의 「송별(送別)」을 읽으면 〈대지의 노래〉가 주는 암울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없다는 것이다. 원시(原詩)는 세상에 대한 원망조차 삭여 생을 달관하는 표현이 보일지언정 독일어로 들려오는, 그래서 내게는 선율의 이미지만 오롯한 6악장의 노래처럼 처연하거나 ‘깊은 슬픔’ 따위는 없어 보인다.


말러는 베케트의 『중국의 피리』에 수록된 「송별」  당시(唐詩) 각색해 〈대지의 노래〉에 넣는다. 오역에 가까운 번역과 각색을 거치면서 이들 시편은 원래의 내용과 정조가 바뀐다. 동양에 대한 관심과 환상은 1890년대 세기말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동양적인 , 오리엔탈리즘의 시선만 남는다. 더욱이 한자나 중국어에 능통하지 않은 사람의 번역, 거기에 작곡가의 예술적 해석과 음악적 창작이 섞이면서 생의 달관은 환멸로 옷을 갈아입게  것이다. 어차피 달관의 뒷면에 환멸이 없으면 생은 그저 살아지는 것이겠지만….


  말에서 내려 그대에게 술을 권하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그대 말하네, 세상에서 뜻을 얻지 못해

  남산 기슭으로 돌아가 은거하리라고

  그저 떠나가기만 하오, 다시 더 말하지 말고

  산중엔 자욱한 흰 구름 다할 날 없으리니

  ―왕유, 「송별」  전문

  왕유, 『왕유 시선』, 박삼수 옮김, 지만지, 2008.



아름다운 소멸, 사라지는 아름다움


왕유의 「송별」과 말러의 ‘작별’이 다르다고 해서 어느 것이 낫다고 말할 수 없다. 장르의 차이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고 생의 환멸을 느끼든 인생을 달관하든 그것은 사람마다 다른 감각이고 경험의 차이일 뿐이다. 다만, 낙엽이 가지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시간조차 감당할 수 없는 빠른 일상이 아플 뿐이다. 그래서 그 일상을 감내해야 하는 우리는 슬픔을 스쳐 지나가고 아픔을 애써 외면하려는지도 모르겠다.


소멸,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없어지는 것. 말러의 소멸은 끝에 끝없이 다가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이 그의 음악이다. 끝나지 않는 끝, 그의 음악은 끝에 있지 않고 끝나지 않음으로 끝에 닿아 있다. 다가간다. 사그라들며 사그라지며 살아 있는 순간이 말러의 음악이다. 9번은 아니지만 아홉 번째 교향곡, 〈대지의 노래〉.


아픈 일상에 슬픔이 겹친다면 누구든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슬픔조차 아름다움으로 만드는 것이 시와 음악 같은 예술이다. 삭이거나 끄집어내거나 슬픔이 아름다운 건 바로, 일상이 아프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할 때 슬픔은 드러난다. 아픈 일상과 작별하는 것, 그것도 영원히 작별하는 것 역시 아름답다. 소멸의 시간을 되짚는 슬픔은 그것이 아무리 깊은 슬픔이더라도 아름답다. 그러나 소멸과 아름다움 사이에는 그 어떤 인과도 없다. 아름답기 때문에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소멸하는 것은 아름답다. 지금부터 겨울이다. 소멸을 이야기하는 시간, 아름다운 겨울이다.


  어둠을 겹쳐 입고 날이 빠르게 어두워진다

  가지 속에 웅크리고 있던 물방울이 흘러나와 더 자라지 않는,

  고목나무 살갗에 여기저기 추억의 옹이를 만들어내는 시간

  서로의 체온이 남아 있는 걸 확인하며

  잎들이 무섭게 살아 있었다

  

  천변의 소똥 냄새 맡으며 순한 눈빛이 떠도는 개가

  어슬렁어슬렁 낮아지는 저녁 해에 나를 넣고

  키 큰 옥수수밭 쪽으로 사라져간다

  퇴근하는 한 떼의 방위병이 부르는 군가 소리에 맞춰

  피멍을 진 기억들을 잎으로 내민 사람을 닮은 풀들

  낮게 어스름에 잠겨갈 때,

  

  손자를 업고 나온 천변의 노인이 달걀 껍질을 벗기어

  먹여 주는 갈퀴 같은 손끝이 두꺼운 마음을 조금씩 희고

  부드러운 속살로 바꿔준다 저녁 공기에 익숙해질 때,

  사람과 친해진다는 것은 서로가 내뿜는 숨결로

  호흡을 나누는 일 나는 기다려본다

  

  이제 사물의 말꼬리가 자꾸만 흐려져간다

  이 세계는 잠깐 저음의 음계로 떠는 사물들로 가득 찬다

  저녁의 희디흰 손가락들이 연주하는 강물로

  미세한 추억을 나르는 모래들은 이 밤에 사구를 하나 만들 것이다.

  

  지붕에 널어 말린 생선들이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전혀 다른 말을 하기 시작하고,

  용암(熔岩)처럼 흘러 다니는 꿈들

  점점 깊어지는 하늘의 상처 속에서 터져 나온다

  흉터로 굳은 자리, 새로운 별빛이 태어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허름한 가슴의 세간살이를 꺼내어 이제 저문 강물에 다 떠나보내련다

  순한 개가 나의 육신을 남겨 놓고 눈 속에 넣고 간

  나를, 수천만 개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담고 있는

  멀리 키 큰 옥수수밭이 서서히 눈꺼풀을 내릴 때

―박형준,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전문

박형준,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문학과지성사, 1994.


https://youtu.be/_Z4nnIJ0A7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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