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파 라히리의 단편집 <그저 좋은 사람> 단상
우리 엄마, 아빠는 참 다르다.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노년생활만 봐도 그렇다. 예를 들어 아빠는 4층짜리 건물을 지어 각 층마다 우리 세 자매의 부부가, 나머지 한 층에 엄마 아빠가 살고 싶다고 한다. 반면, 엄마는 홀로 시골에서 조용히 살거나 여행하며 살고 싶다고 한다. 자유롭게 살고 싶은 거다. 낮이고 밤이고 늘 가족에게 매여있었으니까. 넉넉하지 않았던 내 어린 시절, 엄마는 아이를 키우면서 부업을 했고 아빠가 사업을 시작하자 낮엔 아빠 사무실에서 일하고 퇴근 후엔 집안일을 했다. 아이들이 커도 엄마의 일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엄마는 책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 엄마를 따라 동사무소 2층의 작은 도서관에 다니던 기억이 난다. 조용한 실내, 말없이 책장을 넘기던 엄마 옆에서 나 역시 책을 읽었다. 엄마에겐 자신만의 책장이 따로 있진 않았지만 늘 책을 곁에 두었다. 내가 박완서와 은희경, 김인숙, 양귀자를 알게 된 건 모두 엄마 덕이었다. 나의 중학교 시절, 엄마는 퇴근 후 한 시간, 그러니까 우리들에게 저녁을 차려주기 전 한 시간 동안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엔 주말마다 마라톤을 하더니 고3 가을, 엄마는 42.195km를 완주했다. 어느 날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뛰냐고 물으니 엄마는 “생각하려고 뛰는 게 아니라 생각하지 않으려고 뛰는 거야.”라고 답했다. 동생들이 대학을 들어가고 나서는 홀로 설악산 비박을 가기도 했고 눈 쌓인 한라산을 다녀오기도 했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집 <그저 좋은 사람> 중 '머물지 않은 방’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인생의 짝을 찾는다고 그렇게 헤매고서, 그 사람과 아이까지 낳고서...(중략)... 그렇게 절실하게 혼자 있길 원한다는 건 끔찍하지 않은가. 아무리 짧은 시간이고, 그조차 점점 줄어든다 해도 사람을 제정신으로 지켜주는 건 결국 혼자 있는 시간이라는 사실이.”
사람들은 저마다 부부, 부모와 자식 같은 가족 관계의 맥락 속에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거기에서 주어지는 역할들은 우리 자아의 일부분일 뿐이다. 하지만 어릴 땐 엄마가 아닌 엄마를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독서, 마라톤, 수영, 모두 엄마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시간이었음을. 작지만 온전한 자신만의 시간을 통해 '제정신'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음을.
요즘 우리 엄마의 ‘혼자 있는 시간’은 블로그다. 비공개인 그 블로그를 엄마가 보여준 적이 있다. ‘볼래?’하고. 어린 시절, 결혼식, 나와 내 동생들을 낳았던 때, 그리고 요즘 이야기가 짤막하고 단정하게 써있었다. ‘지향이 엄마’로 불리는 경우가 더 많은 우리 엄마지만 달의 뒷면처럼 내가 전혀 모르는 엄마의 시간들이 담겨 있었다. 잠 안 오는 밤, 방에 누워 핸드폰으로 글을 썼을 그녀를 상상할 수 있었다.
같은 소설집에 담긴 '길들지 않은 땅' 속 루마의 아버지는 자식들의 결혼과 아내의 죽음으로 모든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시애틀 교외에서 사는 딸의 집을 방문한 그는 어느 세대이건 속절없이 반복되는 부부와 양육의 역사를 다시금 마주한다. 생활의 의무를 마주하면 부부 사이란 연애 시절과 다르고,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신성한 일이지만 몸이 삭아가는 일이다. 이제 자신의 딸이 아내와 똑닯은 모습으로 똑같이 살아가고 있다. 루마는 손자를 돌보고 설거지를 하고 정원을 가꾸는 아버지 덕에 잠시나마 숨통이 트인다.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던 루마는 함께 살자고 제안하지만 아버지는 거절한다.
‘지금, 딸은 평생 그가 해준 것에 더하여 그를 필요로 했다………그는 다시 가족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 복잡함과 불화, 서로에게 가하는 요구, 그 에너지 속에 있고 싶지 않았다.’
자꾸 엄마 생각이 나는 구절이었다.
X축을 나이, Y축을 의무의 양으로 두고 우리의 삶을 그래프로 그려본다면 그것은 아마 포물선 모양을 그럴 거다. 이제 내가 그 포물선의 꼭대기를 향해 가고 있다면 엄마는 이제 낙하지점이 가까이 가고 있다. 여전히 그녀는 의무와 일을 등에 지고 있긴 하지만 자유에 조금씩 더 가까이 가고 있다. 그녀가 늙어 자유롭고 싶다고 했던 것은 나의 10대 시절부터였다. 농담이 아니란 걸 안다. 아마 그녀가 그렇게 자유로워지면 투정 부릴 사람,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과 멀어진 것 같아 나는 조금 쓸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가 어서 온전한 자신의 모습으로 자유롭게 노년을 보내길. 기꺼운 마음으로 그때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