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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아 Aug 23. 2016

할머니의 편지

17세 소녀와 운동하는 할머니 이야기

붙박이장 위 내 보물상자를 정리하다 문득 발견한 몇 장의 편지.. 


아 맞다 그랬었지.. 17살.. 고1 때.. 방학 동안 동생의 친구 외할머니 운동시켜드리는 일을 했었다. 

할머니는 중풍으로 매일 재활운동을 하셔야 했는데 붙잡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엄마는 "할머니가 친구가 필요하대, 가볼래?" 물었고 나는 흔쾌히 오케이를 했지만 사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1시간 동안 체중이 꽤 나가는 할머니를 붙잡고 집안을 계속 걷는 일이었는데 운동이 끝나면 둘 다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땀을 식히는 동안에도 나는 할머니 옆에서 다리를 주물러 드리며 쫑알쫑알 계속 떠들었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할머니는 본인의 아픔을 걱정해주기보단 잊게 해 주는 모습을 더 반가워하셨는지도 모르지.. 

갈 때마다 봉투에 편지와 현금 얼마를 넣어서 용돈 하라고 주셨다.  


그리고 매일매일 다시 와주길 바라셨는데 방학이 지난 다음부터는 가기가 어려웠다. 

그 이후 꽤 오랜 시간 잊고 살았는데 오늘 편지를 발견하고 아버지에게 물었다.


" 할머니 돌아가셨어?" 

" 언제 돌아가셨는데 넌 왜 그걸 이제야 묻냐?"

" 아.. 돌아가셨구나.. "


편지에 고스란히 묻어나는 할머니의 살고자 하는 의지.. 삶에 대한 고마움.. 

뜻대로 오래 사시진 못했지만 정말 훌륭한 어른이었다..


몸이 많이 아프신 날엔 글도 짧았었네.. 편지를 20-30장 받았던 것 같은데 다 어디 간 거지.. 

한자로 되어 있는 부분을 풀어서 다시 읽어보니 정말 글을 잘 쓰시는 멋쟁이 할머니였구나..

할머니의 편지


오늘도 와주어 정말 고맙다. 예쁘고도 젊은 정아가 나를 도와주니 나는 너무나 행복감을 느끼네. 사랑해요. 내일 또 와주어요. - 할머니 -


정아가 온다! 예쁜 정아와 오늘도 같이 손을 잡고 보낼 수 있으니 나는 무한한 행복을 느끼네. 나는 나을 것이야. 꼭 나아야 한다. 그리고 너와 같이 산책도 하고 머릿속에서 그려본다. 예쁘게 잘 자라 다오. - 할머니 -

고마워요. 즐거웠어요. 내일 또 만나요. - 할머니 -


수고했어요. 젊고 예쁜 정아가 오니 너무나 기쁘네요. 나도 용기가 나네요. 행복합니다. 또 오기를 원해요. - 할머니 -


사랑스러운 정아! 할머니하고 운동하니 지루하지 않니? 나는 정아가 올 시간이 되니 기다려지는데 정말 고맙다. 너의 가냘픈 몸을 의지하고 내가 그렇게 용기를 내볼라고 하니 정말 가소롭구나.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겠다는 마음 가소롭다. 오직 내 인내와 확신이다. - 할머니 -


꿈 많은 나이 17세. 나도 저럴 때가 있었단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 후딱 주마등같이 지나가네. 오늘은 다시 안 올 거라고 생각해볼 사이도 없이 1년이 후딱 지났네. 그저 운동이 좋아서 공과 싸우느냐고 말이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정아를 보니 너무나 고귀하다. 생기가 치솟는다. 힘을 얻는다. 나도 할 것이다. 하고 석양의 지는 해를 바라보며 외친다. - 할머니 -


이런저런 생각에 괜스레 먹먹해지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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