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의 끝자락. 어제는 막 걸음마를 시작한 막내조카까지 동생네 세 꼬마녀석이 찾아와 온 집안을 헤집어 놓고 떠났다.
오늘은 둘째처형댁를 찾아 저녁식사를 했다. 결혼하면서 언니곁에 있고싶다는 아내의 바램대로 신접살림을 차린 곳이 처형네 아파트 근처였다. 그렇게 우리집 아이 둘을 키웠으니 아이들 유모차, 옷가지며 모자란 밥 한 공기까지 스스럼없이 신세를 지며 키웠다. 그러니 말이 처형댁이지 고향이 지방인 우리 부부에겐 처가집이나 매한가지였던 셈이다.
동서형님은 우리가 더 가까운 같은 아파트단지로 이사할 때 모자란 전세금 대출을 위한 보증을 서 주기도 했다. 나중에서야 안 얘기지만 친형제간에도 거절했었다는 보증이었다. 상투만 틀었지 그때만해도 세상을 몰랐던 나는 아무런 꺼리낌없이 부탁이 아닌 요청을 했는데 형님 역시 그러마하셨다. 형님 직장 근처 은행 지점에서였는데 지금은 없어진 평화은행이 내게는 그런 기억으로 남았다.
재수를 결심하고 앞뒤 재지않고 대처(大處)라고 생각했던 부산 이모집에 들이닥쳐 신세를 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모부님 내외분께 부모도 쉽지않을 조카 뒷바라지를 시킨 셈이다. 이모부님께서 약국을 하셨으니 이모 입장에선 살림하랴 약국 보시랴 당신 자식 둘까지 얼마나 힘드셨을까 싶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셔서 점심,저녁 내 도시락 두 개에 아직은 중고등학생이던 사촌동생 둘의 도시락까지 정성스레 싸주셨다.
그런데 당시 나는 처음으로 여자친구를 사귀었고 아침마다 현관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느라 지체하기 일쑤였다. 눈치 없던 나지만 눈치 보게 하실 분도 아니셨으니 내 집처럼 그 시절을 보냈다. 그만한 자식 둘을 둔 지금도 이모는 그 시절 현관에서의 내 행동을 흉내내며 놀리신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며 그 때 일을 회상하시는데 지금은 많이도 늙으셨다.
초등학생 1~2학년쯤 됐을 무렵에는 가난한 집에 시집 와 세 남매를 키우는 딸이 딱해보이셨던지 외갓집에서 식모를 보내주셨다. 70년대 다같이 여렵던 시절이라선지 남의 집살이를 하는 처지에도 식모를 들일 수 있었던 모양이다. 10대 후반이나 20대초쯤 됐을까 아무튼 눈망울이 선했던 그 식모누나에게 별난 개구장이였던 내가 꽤나 손이 많이 가고 버거웠을 것이다.
어느 날 정확한 정황은 기억나지 않는데 내가 쥐고 있던 연필을 어찌해서 이제 피어나는 처녀인 누나의 고운 볼에 조그만 점을 만들고야 말았다. 연필심이 여린 살에 박혀 끝이 부러져버린 것이다. 어머니께 호되게 맞았는데 이후에도 누나는 여전히 나와 가장 잘 놀아주는 어른이었다. 볼에 작은 점이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
사람이 제 아무리 일찌감치 철이 들고, 나이 들어 현명하게 처신하신다고 한들 누군가의 신세를 지지않고, 은혜를 입지 않으며 살 수 있을까? 알게 모르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