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마 한 달에 책 몇 권은 읽게 된 것이 불과 수년전부터이니 20대 후반부터 근 20년 가까운 세월을 책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그런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사무실 서가에 꽂힌 책들을 보고 내가 무척이나 책읽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착각할 지도 모른다. 사실 이 책들 대부분은 내 일과 관련된 디자인 관련 서적과 잡지다. 2년전쯤에 오래된 것부터 1000여권을 추려 내었는데도 2000권 남짓 꽂혀있다. 앞으로도 늘지는 않고 계속 그렇게 사라질 운명인 책들이다. 읽는다기보다 보는 책인 것이다.
키보드 몇 번 두드리면 원하는 자료와 이미지를 금새 찾을 수 있는 디지털 세상이다보니 사진과 그림으로 채워진 이런 류의 책들은 그 용도가 다해 차츰 설 자리를 잃어간다. 매달 방물장수처럼 사무실에 들리던 수입서적상의 발길이 끊어진지도 오래다. 차츰 도서구매량도 줄고 주문도 안하게되니 자연히 그리 되었다. 아마 업종을 바꿨을지도 모르겠다. 온라인판매로 가격경쟁이 치열해지고 해외직구마저 가능해졌으니 발품값이 나올리 만무하다.
그래서 근래 내가 읽기 시작했다는 책은 주로 인문학서적이고, 간혹 쥐는 디자인 관련 서적 또한 텍스트로 가득한 이론서나 에세이다. 나는 읽고 싶거나 추천받은 책이 있으면 앱으로 A**이나 Y**24 중고서점부터 검색한다. 그래서 최근 출간된 책이어서 중고매장에 없으면 그제서야 신간으로 구입한다. 다행히 집과 회사 근처에 중고서적 매장이 세 군데나 되고, 신간으로는 교*서적이 두 군데 포진하고 있다. 좀더 구매가 쉽고 저렴한 전자책을 시도해보기도 했는데 주마간산(走馬看山)격인데다 글이 영 달라붙지가 않아 실패로 끝났다.
얼마전 '기업형 중고서점으로 인해 종이책 생태계가 위협받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대형서점에 밀려나는 어려운 영세 서점을 비롯한 출판계 그리고 중고책 유통으로 그 인세를 받을 길 없는 가난한 작가를 생각하면 일견 맞는 말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런 중고서점이 없었다면 주저없이 책쇼핑을 즐기면서 책읽기에 취미를 붙이지 못했을 내 경우를 생각해보면 반드시 부작용만 있는 것은 아니지 싶다. 종이책 시장을 살리는 제도적인 장치를 보완하고 사회적인 합의를 이끌어내서 상생하는 길이 열리기를 바란다.
A,B,C....알파벳으로 매겨진 서가사이를 누비다보면 백화점 쇼핑을 나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렇게 욕심껏 여러 권의 책을 비닐 봉투에 담고 온 날은 왠지 모를 포만감에 젖는다. 요즘 들어서는 미처 읽지 못한 책들에게 쫓기는 기분마저 든다. 그저 그 책들을 포개서 베고 자고일어나면 머릿속에 내용이 들어있는 부질없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어느 날은 이제껏 읽거나 읽다가 덮은 책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책이 여자와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곁에 두고 가까이 하는 아내와 같은 책이 있다. 조강지처인 셈이다. 없는 듯 손이 뻗치는 곳에 있어야지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이미 몇번을 읽었지만 새삼 처음 본 듯한 구절을 만나게 되는 것처럼 긴 세월 알고 있다 생각했지만 남인듯 새삼스러울 때가 있는 것 또한 그러하다. 주로 고전이거나 작고한 작가의 책들이다.
반면 애인처럼 강렬하게 다가와 유성처럼 빛을 사그러지는 책들이 있다. 그 빛은 너무 강해서 잠깐눈을 멀게도 하고 둔기에 맞은 듯한 충격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오래지않아 그 빛에 익숙해지거나 정신을 되찾을 즈음에는 심드렁해지는 것이다. 자기계발서거나 타고난 이야기꾼의 현대소설 종류다.
그런데 정작 처분하고싶은 골칫거리가 되는 책들이 있다. 굳이 분류하자면 술집 작부와 같은 책인데 의외로 베스트셀러나 다작인 작가의 책들 중에 많다. 감미로운 미사어구나 어디선가 봄직한 고상한 문장으로 분칠을 하고 달콤하게 유혹한다. 하지만 교태에 취했다 자리를 뜰 때는 빈 호주머니를 더듬게되는 후회만 남기는 책들이다. 짙은 향으로 이끌지만 나중에는 골치만 아프게하는 인공방향제같은 책이다. 그래선지 끝까지 읽어내지 못한다. 그 관계가 오래 지속될리 만무하다.
늦은 감이 드는 책읽기지만 그마저 모르고 늙어갔으면 어떡할뻔했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 좋지않은 시력이지만 이대로만 유지하고, 걷는 것도 게을리 하지않아 다리 힘이 부치는 일 없이 책방순례를 이어갈 수 있게 해야겠다.
그리고 가끔은 어줍잖은 글쓰기로 작가 흉내도 낼 수 있으면 더할 나위없이 행복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