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럴 줄 알았다' 술을 마셔 본 사람은 안다.
추운 겨울. 바깥에서는 멀쩡하다 집안으로 들어서 따뜻한 훈기를 맞으면 속에서 올라오는 그 심상찮은 기운을...
어제 밤늦은 시간까지 작은 녀석이 들어오질 않았다.
친구와 한잔(?)하신다고 했단다. 나라가 정한 미성년자의 셈법은 잘 모르겠는데 주민등록증을 탁자에 올려놓고 마신단다. '아직 졸업은 안했으니 고등학생 아닌가?'란 의문이 생기는 지점이다. 그 친구란 녀석을 안다. 지 놈과 키도 용모도 안경까지 비슷해서 멀리서 보면 헷갈릴 정도였던 고1 같은 반 친구다.
내 스마트 폰 알람이 떴다.
카드사용 내역이다, 계산을 하셨나보다. 얼추 몇병을 마셨는지 안주는 어떤 걸 드셨는지 가늠이 된다. 나눠서 냈으면 두배를 드셨다는 건데 좀 과하게 드신(?)듯 하다. 처음 제대로 마셔 본 걸게다.
얼마 안있어 아내의 폰이 울린다.
택시가 잘 잡히지 않으니 제 놈과 친구를 모시러 오라는 호출이다. 탓할 수 없다. 오히려 사전에 지 엄마가 신신당부한 바를 들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취했다 싶으면 어디든 불러 엄마가 데리러 갈게 꼭 그래야 돼. 알았지 꼭~!"
심약한 아내는 연말에 '대리기사'가 됐다. 어떤 때는 너무 춥다고 버스정류장에 딸을 데리러 가고, 두 녀석 중 한 녀석이라도 술 약속이 있다고 하면 '대기모드'로 진입한다. 내 눈치까지 보게 할 수는 없겠다싶어 이제 나무라는 걸 포기했다. 아내 말마따나 우리 품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내는 약한데 엄마는 강하다.
같이 데리러 가겠냐는 아내의 제안을 거부했다.
"내가 가면 ㅇㅇㅇ(아들 친구)가 불편해 할 수도 있잖아" 정작 속내는 추운데 옷갈아입고 나가기 귀찮아서다.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먼저 올려보냈으니 현관에 나가봐. 많이 취했어" 지하에 주차하러 가기 전에 내려 준 모양이다.
'이런... 취한 아들 놈 시중까지 들어야 돼? 내가...? 아빤데...새파란 놈이..이걸 그냥 확 마..'
잠시 아빠로서 어떤 스탠스를 취하고 무슨 말을 해야할까 골몰하는데 몸은 이미 슬리퍼를 신고 엘리베이트 앞에 서 있다. 좀체 올라오지 않는다. 아내와 함께 올라왔다.
"1층에서 안올라가고 기다리고 있더라구"
제 놈이 뭘 잘했다고 히죽히죽 웃는다. '이럴 땐 어째야지?' 아직 태세가 갖춰지지 않아 멈칫하는데
"아빠~ 아빠~!
"왜 임마?"
"아빠~ 우리 아빠~!"
안방까지 쫒아 온다. 아내는 외투를 벗자마자 주방으로 간다. 놈은 침대에 앉아 계속 히죽대며 얼굴을 들이민다. 징그러워야 정상인데 5살배기 아이가 거기 있다. 그때는 정작 커가는 걸 못봤다. 살아갈 수록 쓰리고 아쉽다. 그러다 녀석이 나를 끌어 안더니 갑자기 운다. '뭐지? 절친의 대입 실패때문에? 아니면 고생(?)하는 애비가 불쌍해서...? 아니면 다른 뭐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슬퍼서 우는 것만도 아닌듯 싶다. 재빨리 눈물을 훔치며 "아니 아니지" 주절댄다. 아내가 꿀물을 타왔다. 내가 아무리 만취해도 이렇게 급행인 적은 일찌기 없었다.
그때다. 술로는 당연히 한참 선배인 나는 안다. 그 타이밍을...
안방 화장실로 급히 뛰쳐 들어간다. 곧장 문을 잠근다. 뻔하다. 아내가 외마디 탄식을 한다.
"아휴 거실 화장실을 쓰라니까..."
이제부터는 내가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혹여라도 아내 입에서 '어쩌면 지 애비하고 술주정 하는 것까지 꼭 닮아서...'라든지, '어이구 내 팔자야..'란 말이 나오면 큰일이다. 불똥이 내게로 튈지도 모른다. 아빠로서의 위엄(?), 술에 대한 훈계(?) 그런 따위는 어느새 우주 밖으로 밀려나고 119대원 모드로 돌입한다.
"아니야 아빠. 잠깐만..."
무시하고 화장실 문을 밀치고 들어가보니 이미 쏟아내고 수습중이다. '많이도 처드셨구만' 이 지경에 구토 소리가 안들렸던 걸로봐서 제 딴에는 취중에도 숨겨질거란 착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술이란게 그렇다. 머리만 감추면 제 몸이 안보일거란 꿩이 되게끔도 한다.
"아빠, 아빠. 제가 할게요"
"괜찮아 얼른 나가. 아빠가 치울게. 넌 엄마만 신경 써. 이러면 니 엄마가 슬퍼해. 알지? 마음 아파한다고...너 그거 삻어하잖아"
"엄마 안 싫어하시던데..."
'그건 니 생각이고... 웃ㆍ기ㆍ시ㆍ네'
"아냐. 엄마 낙담할 지도 몰라. 얼른 나가. 그리고 니방 가서 얼른 자. 엄마한테 니가 어떤 아들인지 알잖아. 아.. 자기 전에 이 꼭 닦아. 꼭 닦아야 돼. 주취는 잇몸에 남는거야 "
"네..."
녀석이 세수를 하더니 나간다. 노련한 119대원으로서 신속한 조치를 취하고 나왔더니 녀석은 아직 침대에 앉아있다. 지 엄마와 실랑이를 하는 중이다.
"아빠, 엄마, 저 여기서 엄마 아빠 사이에서 자면 안돼요? 저 원래 엄마 아빠 사이에서 낳으니까 당연히..."
새삼스럽지도 않다. 이전에도-물론 취중이 아닐 때- 자주 하던 어리광이다.
"그래 그렇지. 근데 니 덩치가 보통이니? 그래서 저번에도 이 엄마가 모서리로 밀려나 떨어질 뻔 했잖아"
"아 그렇지. 알았어요"
그제서야 일어선다. 그림자가 길다. 녀석은 185다.
순간. 나는 봤다, 아내의 눈동자를....
혹시나 조바심내던 내가 무색해졌다. 아내의 눈동자가 하트다. ' 아....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배신감이 밀려온다.
"당신. 나야? 아들이야?"
"당신이지"
'웃ㆍ기ㆍ시ㆍ네.... 내가 다 봤거든...'
다비드상의 눈동자가 하트모양이란다.
미켈란젤로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