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채비

by 문성훈

오늘 아들녀석이 일전에 미팅했던 여학생과 데이트가 있다는 정보를 딸아이가 흘려줬다.

어느 집이나 그렇겠지만 두살터울 남매지간이 각별하다. 딸아이는 아기때부터 남동생을 이뻐했고 자랑했다. 아들은 가끔 예민하고 까탈스럽게 구는 누나를 이해하고 받아주는 게 오빠같을 때가 많다.
성인이 되고서도 이 둘은 내밀한 사생활까지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 아침부터 아들녀석이 흥얼거리고 돌아다니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딸아이가 아들의 저녁 데이트건을 알려준거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아들의 사생활은 딸을 통해서, 딸에 관해서는 아들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다.

굳이 그런 루트가 아니더라도 아내가 아이들과 자주 오랜 대화를 나누면서 키워서인지 세 사람간에 비밀이랄게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는 내가 이방인인 셈인데 큰 결정이나 주요 사안만 신경쓰면 되니 오히려 편한 구석이 있다.
선친은 살아생전에 자식인 우리를 '알맹이'라 부르셨고, 당신은 '껍데기'라고 하셨다. 당신은 알맹이를 보호하고 지키는 단단한 껍질에 불과하다 여기셨고, 당신의 정수는 자식에게 있다는 의미셨으리라.

아내와 딸은 여자들끼리 외식을 하러 나갔고, 과제를 서두르는 아들과 둘이서 점심을 차려 먹었다.
"너 오늘 데이트 있다며?"
"네"
"어떤 여학생인데? 어디가 마음에 드는데?"
우리 식구는 이제까지 아들이 사귄 여자친구에 대해서 이미 다 안다. 나 역시 딱히 궁금해서가 아니라 군대에서 신병 연애담 듣는 내부반 고참 기분이 되어서 묻는 것이다. 신세대의 연애관과 성의식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자뭇 흥미진진하고 가끔은 놀라기도 한다.
이런 기회로 부자지간 둘만의 비밀도 생기기도 하는데 실상 별것은 아니지만 그런 비밀이 한 두가지 생기면 괜히 기분이 좋다. 공범의식 비슷한 게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지금은 여사친으로 지내는 녀석의 고교시절 여자친구 얘기까지 거슬러가던 중이었다.
"근데 아빠 저처럼 이렇게 얘기 다 하는 아들도 없어요"
"알아. 짜샤... 그런데 OO이하고는 어디까지 갔냐?"
"아 참 아빠는... 이건 엄마한테는 비밀인데...'근데 어차피 아빠는 엄마한테 다 말하잖아요...."
"아니라니까. 이번에는 비밀 지킬께. 사나이끼리 약속한다니까..." 이 방면으로는 아빠로서 그리 신용이 높은 편이 아니다.

내가 딱히 교훈적이거나 규범적인 얘기를 하는 경우는 없다. 우리집 교육부 장관은 아내다. 오히려 나는 나쁜 형아나 불량한 친구 역할을 해서 아내에게 지적을 받곤 한다. 아들 성격이 선한(?) 아내를 닮은 구석이 많아 못내 아쉬울 때가 있기는 하다.
이런 대화의 마지막은 대개 "니가 아빠 엄마한테 어떤 아들인지 알지? 특히 엄마한테는.... 그것만 명심하면 돼."로 끝내기 마련이었는데 오늘은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근데. 아빠가 이만큼 살아보니까 말이다. 남자는 30대까지는 부모의 음덕과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로 만들어지는 것 같고, 그 이후에는 여자가 만드는 것 같더라"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남자의 일생에 여자의 역할이 그만큼 대단하더라는 거지. 좋은 남자가 나쁜 여자와 만나면 남자도 나빠지고, 원래 나쁜 남자였더라도 좋은 여자를 만나니까 남자도 좋은 사람으로 변하더라. 반대의 경우는 아직 못본 거같아. 없다고 봐도 돼."
"그래요? 누가요? 예를 들면..."
"뭐 멀리 갈 거 있냐. 너는 그냥 이 아빠를 보면 되지"
"아~~ 정말 그렇네. ㅎㅎ 맞아요. 그런 것 같아요. 확 이해가 돼요."
'이 짜식이....그냥 확... 암튼 지혜롭고 따뜻한 사람을 만나는 게 그만큼 중요해. 거 왜 있잖냐 늘 잘 웃고 밝은 사람. 주위를 밝게 만드는 사람 있잖냐. 아빠는 니가 그런 좋은 배우자를 만났으면 좋겠어. 니가 정말 행복하고 성공한 삶을 살려면 말이다"
"네. 알겠어요."

딸과 함께 외출했다 돌아 온 아내가 삶은 밤을 가져왔다. 알밤이 실하다. 가을이 깊어가는 산에는 밤송이가 널렸겠다.
나도 그렇게 가시밤송이 껍데기로 살다가 터지는 날이 올거다. 낙엽과 함께 땅바닥을 뒹굴다 사그라지겠지만 세상에 실한 알밤은 내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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