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이 그리 나쁜 편도 아닌데 그렇다고 난독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가끔씩 나는 저능아가 아닐까 고민할 때가 있다.
아내는 이미 오래전에 파악하고 있던 사실이기도 하다. 못말리는 길치인 것은 나 스스로 떠벌리고 다니니 흔히 사람들마다 한 두가지쯤 나사가 풀리거나 빠진 구석이 있기 마련이라서 그런데로 웃고 지나가긴 한다. 그런데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던 영화의 중간쯤에서 이미 봤던 영화라는 걸 깨닫는다든지 책의 한 대목을 듣게되어서 무릎을 치며 탄복했는데 알고보니 이전에 읽었던 책이란 걸 알게 될 때의 허탈함 내지는 자괴감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물론 그런 영화의 대부분은 오락성이거나 액션물이긴 하다.
결정적으로 그 증세가 나아질 기미는 커녕 심해지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기 시작한 건 지난 추석 연휴에 있었던 사건때문이었다. 추석 연휴에 영화 몇 편을 몰아서 봤다. 그 중 한 편을 보다가 거의 후반부에 접어들어 결말에 이르러서야 "어 이거 봤던 거네"라고 하니 아내가 외계인보듯 나를 돌아봤다. "당신 더 심해지나봐" "그러게"
한두번 갔던 길을 못찾는다거나 영화 중반부에 이르러서야 이미 봤었다는 걸 깨닫는 건 그래도 나은 편인데 책의 경우는 속상하다. 신줏단지 모시듯 하지는 않지만 나는 책을 무척 깨끗하게 읽는다. 그에 비하는 한 공간을 나눠쓰고 있는 O교수의 책은 밑줄과 메모로 가득차있다. 그래서인지 책의 인상적인 대목이나 플롯을 거의 토씨까지 빠트리지 않고 그대로 재현한다. 대화를 나누다보면 부러울 때도 있다. 같이 읽은 책인데도 그가 얘기를 해주면 그제서야 떠올리기 때문이다.
길이야 네비게이션이 워낙 잘 되는 세상이니 큰 불편함을 못느끼고 영화는 몇 번을 반복해서 본 들 상관이 없다. 그런데 책마저 그래서는 안되지 않을까 한동안 고민도 했었다. 감명깊은 대목을 필사를 해둘까도 생각해봤다. 한달동안에도 수없이 많는 신간이 쏟아져 나오고 아직 시도도 못한 고전이 즐비하다. 읽으려고 사재는 책은 많은데 읽고도 좀체 기억을 못하니 이러다간 책이라는 가위에 눌릴지도 모른다.
세상은 넓고 읽을 책은 많다. 그런데 아직 읽어보지 않은 소설의 한 대목을 발견하고 그간의 조급증과 불안이 어느정도 가셨다.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지난 삼십오 년간 나는 그렇게 주변 세계에 적응해왔다. 사실 내 독서는 딱히 읽는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 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석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그런 식으로 나는 단 한 달만에 2톤의 책을 압축한다. 하지만 이 일을, 신께서 축복하신 이 작업을 완수할 힘을 얻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맥주를 마셨다. 지난 삼십오 년 동안 내가 마신 맥주의 양이면 올림픽 경기장의 풀이나 잉어양식장도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뜻하지 않게 현자가 되었고, 이제는 내 뇌가 압축기가 만들어놓은 수많은 사고로 형성돼 있다는 걸 깨닫는다. 머리털이 모두 빠져버린 내 머리는 알리바바의 동굴이다. 모든 사고가 인간의 두뇌 속에만 각인되어 있던 시절은 지금보다 훨씬 근사했을 것이다. 그 시절엔 책을 압축하는 대신 인간의 머리를 짜내야 했겠지. 하지만 그래봐야 부질 없는 건 진정한 생각들은 바깥에서 오기 때문이다." -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그래 책 속의 사상이건, 문장이 내 모세혈관을 타고 어딘가에 녹아들어 있겠지. 아무려면 어때. 나는 막걸리도 풀을 채울 만큼 많이 먹지 않는데 뭘....' 큰 위안이 된다. 한 10년쯤 지나면 나도 한 구절정도는 저렇게 수려한 문장으로 쓸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