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그렇게 사시잖아요

by 문성훈

6만7천원. 예상보다 많이 나왔다. 라면 5개들이 덕용포장 3개와 계란 32개들이 한판, 맥주 4캔, 비엔나 소세지.
대파는 겨우 흰 머리만 박고 파란 생머리카락은 큰 비닐봉지 밖으로 너풀거릴 정도로 꽉 찼지만 정작 부피만 큰 것들이지 비싼 것은 없는데...

아니다. 벼르던 마른 오징어를 샀다. 6마리가 들어있다. 그런데 2만 3천원이다. 그러니까 전체 금액의 1/3이 오징어 값이다. 혼자 마트를 왔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내와 동행했던 지난 두 번의 장보기에서 담지 못했던 마른 오징어다. 한번은 만지작거리다 자진해서 황태로 대체했고,
두번째에는 카트에 담다가 "얼마야? " "2만3천원" "너무 비싸. 사지마" 할수 없이 내려놓았던 오징어다. (좀체 그렇게 포기하는 일은 없었다)

아내나 아이들의 부탁을 받아서 마트에 들르는 경우는 있어도 혼자서 오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그날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상품권이 생겼다. 정확하게는 상품권을 샀다고하는게 맞는 말이겠다. 연회비가 9만원인 플래티늄 카드 회사에서 주는 상품권이니까. 이미 신청해서 받았어야 할 작년 쿠폰은 시일을 넘겼는데 어찌어찌 잘 해결이 되어서 작년과 올해의 쿠폰을 모두 받았다. 정해진 날짜 이전에 상품권으로 교환을 해야해서 들른 김에 장을 본 것이다.

식료품은 씽크대와 냉장고에 넣어두고 오징어만 따로 나만 아는 장소에 숨겨뒀다. 그래도 새앙쥐같은 아들녀석은 귀신같이 찾아내겠지만. 그런 식으로 주전부리를 숨기다보니 어디다 넣어뒀는지 잊어버리거나 이전에 샀던 것마저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발견하기 일쑤다.
어제 맥주를 마시느라 찾아보니 마른 오징어 1마리가 남았다. 벌써 5마리를 먹었나보다. 아니면 스리슬쩍 아들놈이 몰래 빼갔는데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매번 세어놓을 정도로 쪼잔한(?) 아비는 되고 싶지 않다.
실은 아들과 보물찾기 놀이하는듯한 재미가 쏠쏠해서 그런다는 아내 말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아들녀석이 숨겨놓은 건 내가 잘 찾아서 먹기도 한다.)

우리 부부를 아는 가까운 친구들과 후배까지 아내편일 정도로 이제껏 나는 제멋대로, 하고 싶은대로 살아온 남편이다.
그동안 그런 보헤미안 기질의 자유로운 영혼을 아내는 받아주고 살았다. 떠나고 싶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휭하니 집을 나서고, 가지고 싶은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져야 했고, 하고 싶은 것은 하고 살았다. 사표를 쓰고, 회사를 차릴 때도 아무런 상의없이 저지르기 일쑤였으니까. 만사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거침없이 구는 바람에 아내가 속을 끓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니 사소해보이지만 혼자서 장을 본 얘기며 1축도 되지않는 마른오징어를 아내 눈치가 보며 들었다 놨다 한 에피소드를 들려주면 그들은 박장대소하며 그들의 세계에 넘어온 걸 환영할 것이다. 그러면서 내심 천연기념물에 가깝던(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사내의 퇴장을 씁쓸해 할 지도 모른다. 내가 그들을 대리만족시켜주던 부분도 분명 있었을테니까....

미안해서다.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다보니 그랬다고 변명한들 아이들 어린 시절로 돌아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줄 수도 없고, 젊을 때는 철이 없어 속을 썩였노라고 사과를 하고 싶어도 이제는 철이 들었는지도 잘 모르겠고, 앞으로 철없이 굴지 않을 자신도 없다.
그래도 앞으로는 아내 말에 순종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눈치도 보고 분위기 봐서 내 목소리부터 죽이는 연습을 해 볼 양이다.
내 생각을 벌써 읽었는지 최근에는 여자여자한 아내의 남성호르몬 분비가 왕성해진 것 같기도 하다.

좀전에는 아들녀석이 밖에서 사온 아이스 카라멜마키아토를 뺏어먹었다가 다시 사달라, 이런 식이면 다음달부터 용돈 삭감하겠다 옥신각신 다퉜다. 논리에서 밀려서 마침내 아들 머리통을 깨무는 위력을 행사했다. (자주 그런다. 아들은 산만한 덩치인데도 '감히 아빠한테 방어를...'하면 순순히 당해준다.) 그렇게 옥신각신 뒹구는데 휴일임에도 모니터 앞에 있던 아내가 빽 소리를 질렀다. "내가 이래서 집에서 일을 못본다니까... 하여튼 둘 다..." 우리는 그 순간 얼어서 묵음으로 자잘못을 따지다가 타협을 봤다. 카라멜마키아토 건은 없었던 걸로 하기로...

또 저녁식사 시간에는 스마트폰을 잠시 들었다가 아내에게 퉁을 맞고 조용히 그리고 공손하게 내려놨다. 저번 마른 오징어처럼.....

#사진은_롤모델로_삼은_어느외국인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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