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옷 차림에 무릎까지 덮는 긴 파커로 몸을 감싸고 현관문을 나섰다. 새벽 3시를 넘긴 시각에 누군가와 마주 칠 확률은 희박하겠지만 그래도 한결 마음편한 복장이다. 한 개피 남은 담배를 피러 나선 걸음이다. 담배도 한 갑 사둬야겠다. 우리 아파트에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은 1시까지 영업을 한다. 혹시나 연말이고 휴일이니 다를까 싶어 큰 길가로 나가봤다. 멀찌감치 편의점이 보인다. 안은 훤하게 밝혀뒀는데 간판불은 꺼져있다. 문을 닫았다는 의미다. 어김없이 지키는 룰이 따분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예상이 맞았다고 늘 좋은 것만도 아니다. 가끔은 생각치도 않은 장소에서 묻어뒀던 연인을 만나기도 하고, 이미 결정이 나서 포기한 일이 벼락처럼 꽂혀 혼비백산하기도 해야 사는 게 사는 것 같다. 한 줄로 긋다 일순간 파형이 쳐야 살아나는 심장마비 환자처럼 말이다. 담배 사는 건 쉽게 포기한다. '몸에도 안좋은 걸 뭐... ' 그렇다면 실은 끊는게 맞다.
몸 상태가 별로다. 사흘 전부터 입술이 근질대더니 마침내 짓물렀다. 피로가 쌓이거나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늘상 있어왔던 일이긴 하다. 무리한 일이 없었으니 스트레스가 원인이다. 입술 위가 짓물러 면도하기가 불편하다. 덥수룩해진 수염때문에 세수를 해도 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혹시... 그냥 물어보는건데... 당신 수염 또 기르기로 한거야?" 간섭받는 걸 질색하는 남편을 둔 아내의 질문이 조심스럽다. "기르긴 뭘... 입술때문에 아파서 냅두는거지..." 우리는 중고서점에 들렀다 돌아오던 중이었다.
어젯밤 스마트 폰 앱을 눌러보니 근처 중고서점에 기다리던 책이 들어왔다. 앱으로 재차 재고를 확인하고 나서는데 아내도 산책삼아 따라가겠다고 했다. 서점에 도착했더니 그새 누군가가 사갔다. 앱을 눌러보니 '품절'이 뜬다. 짜증과 허탈이 겹친다. 컨디션이 안좋아서 더 그럴 수도 있다. 꽤 먼 거리를 걸어서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오기는 아쉽다. 앱에 저장해둔 관심책 리스트를 뒤져 두 권을 샀다. 그 중 한 권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내려온 참이다. 아깝게 시간차로 못샀던 책보다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싶을만큼 내용도 좋고 울림도 크다. 나를 반성하게 하는 책은 늘 훌륭하다.
실은 사흘전부터 짓무른 입술에 이틀전부터는 설사가 이어지더니 오늘은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저녁 무렵 서점으로 외출했다 돌아오니 몸이 으슬으슬 한기가 들었다. 몸살약을 먹고 소파에 누워 동영상을 듣다가 거진 마지막 장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고보니 밤 9시가 넘었다. 이런 날은 다시 잠들기 어렵다. 덕분에 책 한 권을 읽을 수도 있었다. 그럭저럭 괜찮은 날이다. 글쓰기 동영상 강의를 듣고서 나는 쫒아갈 수 없을것 같으니 그냥 내 식으로 써야겠다는 작정을 하게 됐고, 정작 사려던 책은 못사고 다른 책을 샀지만 아주 좋았으니 말이다. 그렇게라도 혼자 물장구를 칠 수 있는 날은 다행이다. 일상의 파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