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두려움

by 문성훈

유유자적 한여름 오두막에서 나누는 한담처럼 쓰는 글이지만 나는 글쓰는 게 여전히 두렵다.
어쩌다 에세이 한 권을 냈지만 누군가 ‘작가’라는 호칭으로 부르면 불에 덴듯 끔쩍 놀라 손사래를 친다.
필부에 지나지 않지만 문화와 문명의 단초를 제공한 언어의 엄중함을 알고, 내 깜냥을 익히 가늠할 수준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글쓰기를 멈추지않는 이유는
첫번째는 나 자신의 쾌락과 희열 때문이다. 물론 어렵거나 힘들지 않다고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마라토너의 러너즈 하이((Runner's High)와 같은 도취감에 빠져서 멈추지 못한다.
두번째는 글쓰는 행위 자체가 나로서는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글은 말과 달라서 한 걸음 뒤쳐진다해도 누가 뭐라하지 않고 한소끔 더 끓이고 익힐수록 더 맛있고 실패할 확률이 적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한 검증, 부족한 자료를 더 들춰보게 되니 자연스럽게 공부가 되고 내 것으로 스민다.
세번째는 나누고 부비는 내 삶의 의미있는 일부분이라서다. 부족한 지식과 정보일망정 그조차 유용할 누군가를 위한다는 사소한 자부심, 위안과 격려가 될 수 있지않을까하는 희망섞인 바램 그리고 나를 자극하고 북돋워줄 따스한 비판과 응원에 대한 기대감을 갖는다. 부디 거기에 지혜와 깨달음을 담길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책을 읽는 이유가 되는 것은 덤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책을 읽으라고들 하는데 나는 ‘글을 쓰다보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

글을 쓰는데 스스로 삼가하는 몇 가지가 있다.
되도록 화를 내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기분이 안좋을 때는 술을 마시지 않는 이유와 흡사하다. 세상 일에 이래라 저래라 참견해서 실제로 무언가가 달라진다면 그렇게 하겠는데 그게 안되니까 그래서 내가 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에 화가 난다.
특정인에 대해서는 더욱 화를 내지 않으려고 한다. 누군가를 증오하는 이유는 그 증오가 사라지면 자신의 고통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라는 말은 아프지만 맞는 말이다.
그래도 늘 의견은 차고 넘치는데다 가끔은 터진 비닐 봉지처럼 새기도 한다. 수양이 부족해서다.

속단하거나 단정적인 태도를 조심한다. 읽을수록 늘어나는 책 빚처럼 채울수록 나의 좁은 식견과 사유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더구나 전문 영역에 관해서는 더할 나위가 없다.
요즘 경제학 관련해서 헨리 조지의 책을 탐독하는데 실타래처럼 얽힌 한국의 부동산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다. 그렇다고 내가 그 문제의 해법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세계 석학도 풀 수 없고 맞추지 못하는 게 경제다.
내가 ‘한국의 부동산 문제는 살아갈 사람이 짓지 않는 아파트와 생산하지 않는 토지가 문제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커다란 퍼즐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나는 지능과 지식을 홀대하는 사람이다. 어쩌면 지능은 경험과 시행착오를 통해 배울 줄 아는 능력일텐데 암기하거나 시킨대로 하는 것으로 오인하는 경향이 짙다.
지식은 더 많은 것을 아는 게 아니라 한 가지를 더 깊이 이해한 결과물이고 그로써 세상에 밝은 빛을 던질 수 있어야하는데 오히려 과신과 오만의 근거를 제공하고 이기적이며 사리사욕을 채우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때가 더 많다.
지혜가 산 정상을 지키는 고목이라면 지식은 계곡을 흘러내리는 물이다. 그러니 단편적인 지식으로 세상을 읽고 빠른 두뇌회전으로 쓰는 글을 지양한다.

설사 전문영역이 아니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도덕, 상식, 예술, 정치처럼 추상적인 대상에 대한 내 인식의 한계는 분명한 것이어서 더 조심해야 마땅하다. 지금 하고 있는 나의 경험이 내일 나의 인식을 바꿔 나갈 뿐이다.
우리는 도덕과 양심을 말하지만 모든 상황에 통용되는 도깨비방망이 같은 만능 도덕기준과 모든 사람이 수긍하는 절대적 양심은 없다. 정상과 상식에 대한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듯이 도덕과 양심의 기준 또한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사람들은 고결한 가치인 도덕과 양심에 순수하고 이상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그런 도덕과 양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법은 평등하다고 알고있고 그래야 한다고 믿고 있지만 현실의 법 기준은 높고 적용은 사람을 가리고 때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니 법을 기준삼아 나누는 흑백논리는 위험하다.

세상에 궤변이 아닌 것이 없고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게다가 인간의 뇌에 관한한 ‘정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기억과 감각, 감정은 기본적으로 왜곡체계다. 내가 본 사실이나 느끼는 감정이 타인에게는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여러 빌딩을 가진 건물주와 가난한 월급쟁이가 내는 세금 체계를 누구나 만족할 수 있도록 수립하는 게 어려운 이유다. 수도권 아파트를 사고도 남을 강남의 십억대 아파트 전세입자가 오른 전세값에 화를 내는데는 그만한 사정이 있는 것이다. 거주 환경, 자식의 교육문제와 출퇴근의 편의성 등의 이유가 있음에도 누군가는 그마저도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자의 “맞고 살지만 잘생겼잖아요” 하는 말처럼 들린다고 타박할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

알면서도 실천이 어렵고 실수도 쉽사리 잊어버린다. 글쓰기가 그렇다.
눈앞에 닥친 현실의 문제이기도 한 정치에 대해서는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고 말한 조지 오웰의 말에 위안을 얻는다.
다만 깨어있는 시민의 조건은 반대할 줄 알아야 한다고 믿는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닌 이기심과 편견을 최대한 억누르고 감정을 다스려서 얘기하려고 한다. 비관론과 회의론을 혼동하는 어리석은 짓을 삼가해야하는 것은 물론이다.

나는 누구든 글을 쓸 수 있고 거기에 자격이나 학력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맞춤법이 틀려도, 문법이 안맞고 문장이 수려하지 않더라도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여든에 글을 깨쳐 쓴 벽촌 할머니의 시에 절로 눈물이 흐르는데는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그 무언가가 존재함을 증명한다. 진심과 펜 그리고 종이 한장이면 족하다. 인류의 문화와 문명은 거기서 출발했다. 현란한 수사나 장식적인 형용사는 겉치레에 불과하고 알맹이 없음을 감추려는 술수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글로써 세상에 무언가를 보여주거나 세상이 주목하는 사람은 의무감을 지녀야 한다. 적어도 다른 사람보다는 나은 것을 보여주겠다는 의무감이다.
작가가 위대하고 존경받는 이유이고 글쓰기를 가르치거나 글쓰기 책을 내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글에 입장을 정하거나 따르려는 지지자들을 이끄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덕목이다. 이미 달릴 줄 아는 사람의 기록을 앞당겨 주는 코치가 얼마나 힘든 직업인지 뒤따르는 사람을 이끄는 패스파인더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안다면 말이다.

가끔 글쓰기에 있어 내가 어느 지점에 닿고 싶은지 내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글쓰기 커뮤니케이터’가 되고 싶다.
과학에 있어서도 커뮤니케이터가 있다. 과학자나 연구자는 아니면서 대중에게 과학을 쉽게 전달하고 가깝게 느끼도록 하는 사람이다. 효과적인 과학 커뮤니케이션 방법(Five rules for evidence communication)’이란 게 발표된 적이 있다. 1. 설득하지 말고 전달하라 2.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라(중요한 것은 신뢰도다) 3. 과학적 사실에 대해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게 말하라 4.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도 말하라 5. 출처 표기를 잘하라

이를 글쓰기에 적용해보면
1. 느끼고 경험한 그대로를 써서 전달한다.
2. 아는 체 하지 않는다 (자신있는 부분이다)
3.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쓴다.
4. 내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다.
5. 남의 글은 출처를 밝힌다.가 될텐데 어느정도 수준에 이르면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마저도 욕심일지는 모르지만 의미있는 일임에는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내가 가지는 두려움의 근원은 내 자신이 독자이고 비평가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부족한지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잘 쓰고 싶은 욕구만큼 쫓아가지 못하는 능력의 한계에 매번 부딪치고 깨지기를 거듭하고 있다.
그래도 글쓰는 두려움보다 안쓰거나 못쓰게 될 때의 고통보다는 나을 것 같기에 쓴다. 행복은 불행이 부재한 상황이라고 했다.

나는 내가 쓴 글에서 좋은 향이 나기를 바란다. 위안이 되고 희망이 전해지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요즘처럼 세상이 한 동네로 느껴지던 때가 또 있었던가 싶다. 눈깜작할 새에 세계 각국의 뉴스가 전파되고 개인의 글이 공유되고 영향을 끼친다. 담배를 피우면 가까이 있던 비흡연자의 폐에 더 심각한 악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프랑스에서건 지방에서건 사실에 근거하지도 않고 음모론에 가까운 글들이 담배연기처럼 미세먼지처럼 날아든다.
비록 미흡하고 완성도가 떨어지더라도 내 글에서 연필의 나무향이 흘러나와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게 작은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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