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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Jan 04. 2021

덤이라서 더욱 소중하다

어제 저녁. 아내와 딸 그리고 나는 식탁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우리집 식탁은 무척 큰 편이어서 독서와 글쓰기를 위한 작업 테이블로 자주 쓰인다. 2m가 넘는데 예전 어느 현장에서 문짝감으로 쓰려던 자작합판 하나가 남아서 테이블 상판으로 쓴 것이다.

딸은 아내에게 스마트폰 동영상을 보여주며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고 나는 노트북을 펼쳐놓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들리는 딸의 목소리에 괴기스럽고 흉측한 단어들이 섞여나온다. "...장이 부풀렀고,.. 췌장이 절단..." 아내는 이미 놀란 토끼 눈이 되어 한손으로는 입을 틀어막고 있다.
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해. 엄마 간 작은 거 몰라서 그래 ! " 이 말은 진짜다. 공포스런 드라마 장면만 잠깐 보고도 잠자리에 혼자 눕기를 무서워하는 아내다.
금새 딸은 뾰로통해져서 항변한다. "엄마가 물어봐서 해주는 거야." 아내는 딸을 변호한다. "내가 물어봤어. 어떻게 된거냐고..."
저녁 상을 물리고 난 푸근한 디저트 타임에 살얼음이 낀다. 아내는 제 소지품을 챙겨 제 방으로 들어가고 아내도 뒤따라 딸의 방으로 간다. 느닷없고 민감한 남편을 변호해주려는 게 분명하다.

"...복부에 피가 가득했던 것은 췌장, 소장, 대장, 장간막들이 지속적인 학대와 구타로 찢어져 있었는데 사망 당일에 다시 이어진 구타로 크게 찢어져서 장간막 파열이 온 것이라고..."
되도록 감정을 거세한 사실에 근거하고 애두르는 객관적 문장만을 옮겨봤다. 법의학과 교수의 소견이다.
사망에 이르게 된 과정이나 십여 항목에 이르는 시신 부검 소견을 필설로 담기엔 모골이 송연해지고 어린 주검에 불경스럽기까지 해서 도저히 못하겠다.
뽀송뽀송한 천사의 모습으로 세상에 온 지 16개월만에 갈갈이 찢기고 헤져서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간 아기 정인이 이야기다.

실은 내가 읽은 원문은 "목사 자녀들이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정인이를 입양했구요...."로 시작했다.
양부모는 독실한 개신교 집안의 자녀로 미션 스쿨에서 만난 캠퍼스커플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두사람 모두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고, 남편은 기독교방송국에 재직하고 있다.
죽은 아기는 말이 없고 아니 말을 배우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것 조차 있을 수 없는 얘기다. 얼마든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서슴없이 거짓말도 할 수 있는 두 사람과 그들을 위해서는 무슨 수라도 쓸 태세인 양가 목사 부모의 힘이라면 그리 오랫동안 몸을 구속당하지 않고 풀려 날 것이다.
지상에서 걸음마도 떼지 못하고 떠난 아기가 깃털처럼 가볍게 그 분 품에 안겼듯이 그때도 젊을 그들은 당당한 걸음으로 교도소 문을 나와 금지옥엽같은 친딸을 품에 안고 살아갈 것이다.
그들 가족에게는 이마저도 겪지 않아도 될 수난인지 모른다. 그들만의 하나님 품안에서 편안히 살아갈 자격이 있는 선택받은 사람들이라고 착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구속영장 실질심사에서 "신만이 인간을 심판할 수 있고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 없기에 그 누구도 자신을 심판할 수 없다"라고 말 한 것을 보면.

죽음, 이별, 고통, 추위는 늘 곁에 있는데도 눈을 돌리고 싶지 않은 단어들이다.
새해가 밝자마자 가까운데서 혹은 멀리서 부고가 날아온다.
한 전도 유망했을 삼십대 젊은 청년이 죽었다. 무관한 내가 그를 기억하는 것은 한 유튜브 채널에서 몇번 봤기 때문이다. 평소 몸관리에 충실했었기에 주변 사람들은 애통한 가운데 당황스런 기색이 역력하다. 그나마 그의 죽음은 기억하고 알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서 대중에게 전해진다.
사건 기록으로만 남을 더 안타깝고 절절한 죽음도 있다. 따뚯한 나라에서 와서 차가운 비닐하우스 냉골에서 동사한 이주 노동자의 죽음이다. 현장에서 각혈이 발견됐다니 결핵이 의심된다고도 한다. 그는 캄보디아인 A로 기록될 것이다. 올해 서른이라고 했다.

나는 16개월된 아기와 젊은 여론기관 이사와 이주노동자 A씨를 말하며 일찌감치 하늘나라로 떠난 내 사촌동생 둘을 떠올린다.
두 학급은 족히 채우고도 남을 형제 많은 우리 집안에서 가장 착하고 순했던 두 사람이다.
나는 날로 황폐해져 가는 지구라는 땅덩어리에서 그리고 사랑보다는 상처를 더 많이 주고받는 삭막한 인간 사회에서 그들을 한시라도 빨리 떼어놓아 곁에 두고 돌보시려는 당신의 뜻이라 믿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그러고보면 당신은 참 잔인한 분이기도 하다. 쓸모 없거나 심지어 해악이 될 뿐인 인간들은 오래도록 지상에 남겨 두신다. 아마 당신도 분리수거가 벅차시거나 폐기장이 이미 가득차서 어쩔 수 없으신 지도 모른다. 아니면 당신 수족들마저 지독한 악취과 구역질 나는 생전 기록에 도리질을 하며 손을 놓고 파업에 돌입한 건 아닐까.

한 조사에서 생존한 한국 가톨릭 인물 중 가장 만나보고픈 사람으로 뽑힌 강우일 주교가 최근 은퇴를 했다.
올해 일흔 여섯. 거리의 사제로 불리는 그는 서울 그것도 명동성당에서 46년 사제 생활의 절반 이상을 보냈다. 한국의 교구중에 가장 작은 제주교구에 내려올 때까지 그는 묵묵히 추기경을 보좌했던 사제다.
화산이었던 오름이 널린 제주여서일까 용암처럼 천천히 흘러내지만 뜨껍고 강렬한 그의 메세지가 터져 나온 것도 그 즈음부터다.  그가 내놓은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는 자연을 파괴하고 생명을 해치는 자들에게는 용암이었지만, 힘없고 약한 이들에게는 위로와 격려의 단비였다.

나는 그가 이미 오래전부터 휴화산이었던 사람이라고 짐작한다. 1973년 로마의 유학생활을 마치면서 바로 귀국하지 않고 1년동안 유럽의 공장과 빈민가 그리고 아프리카 오지를 돌며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했다. 바로 사제 서품을 받으면 머리통만 커져 있고 가슴은 싸늘하게 식어 있는 그런 사람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믿음을 논리체계로 설명하려 드는 서양 신학을 지루하게 느꼈고, 오히려 현장체험이 자신의 정신적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그렇게 원래부터 가슴 밑바닥에 뜨거운 용암을 담고 있던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제주에서 가장 가까운 뭍. 남녁 땅을 걷고 있는 해직 노동자가 있다.
"몸이요? 몸 얘긴 하지 마. 몸은 그냥 치료 중단하고 나온 거니까 나도 몰라요. 어떤 상태인지."
김진숙. 그녀는 올해 복직했다면 정년이 되는 60년생 노동자이자 암환자다. 꽃다운 낭랑 18세부터 메니큐어 대신 굳은 살부터 박힌 그녀다. 해고자 없는 세상을 위해 걷는다고 했다.
나는 그녀가 오랫동안 몸담고 있는 민노총에는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아니다. 오랜 국민의 숙원과 기대를 안고 들어선 민주정부 내에서 벌어지는 이기주의와 거짓, 무능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민노총이 안고 있는 온갖 비리와 이기주의, 난맥상을 현장의 목소리로 듣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 김진숙의 도보 행진에는 그 어떤 사사로움과 혼탁한 의도, 과장과 허위가 섞여있지 않음을 믿고 싶고 믿는다.
나는 그녀의 걸음을 만류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다만 그녀의 투쟁이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과정에 불과하다고 믿고 싶을 뿐이다. 죽음은 그것이 누구이건 안타깝고, 고통은 짧을 수록 좋기 때문이다.

DNA분석을 통해서 알아낸 인간의 생물학적 수명은 38년이라고 한다. 의학의 발달과 생활 수준의 향상으로 현대에 와서 두배로 늘어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생물학적 수명을 지나 덤으로 사는 인생이다. 누군가는 생물학적 수명도 다하지 못하고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는데 축복받은 일임에 분명하다.
이 모질고 험악하며 악으로 넘쳐나는 무서운 세상에서 불과 16개월밖에 안된 생명을 거둬가시는 당신께서 일흔을 훨씬 넘긴 강우일 주교를 여태 우리 곁에 남겨 두신 이유가 있으실 것이다. 재발한 암의 어두운 그림자에도 굴복하지 않고 터널 끝 밝은 빛을 보는 예순살 김진숙의 걸음을 멈추지 않도록 하시는 뜻이 분명히 있을것이라 믿는다.

아직 희망을 접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살만한 세상을 꿈꿔도 된다는 신호를 그렇게 보내고 계심을 믿는다.
귀하게 주신 생명을 허투로 쓰거나 덤으로 선물하신 수명을 거저 주어지 것으로 여기지만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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