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물긴 하지만 책을 추천해달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는데 난감하다.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가지는 분명하다. 어떤 책이든 유용하다는 것 말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글을 말보다 정제되고 조심스럽게 다룬다. 그래서 글자가 소리보다 잔향이 오래남고 수명이 길다. 사설이 웅변보다 순간적인 폭발력은 약하지만 울림은 멀리까지 전해진다. 마치 화산 폭발이 장엄하고 공포스럽긴 하지만 지진이나 해일보다는 덜 위험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흔적과 상처는 더 크고 지우기 힘들다. 최근들어 우리 사회에 책이나 글의 유용성은 남용하면서 위험성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기는 하다.
정말 자야겠는데 잠이 오지 않으면 읽는 책이 있다. 물리학이나 경제학을 다룬 책이 대개 그러한데 물리학은 아무리 대중적이고 쉽게 쓰여졌어도 어려워서이고, 경제학은 쉽게 풀어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굳이 어렵게 설명하는 것 같아서다. 그런데 읽다보면 어떤 수면제보다도 효과가 탁월하니 책은 버릴 게 없는 인류 문명의 자산인게 분명하다. 한여름 자칫 배기기 쉬운 딱딱한 목침 대신 두꺼운 책을 베고 낮잠을 자 본 사람은 안다. 읽고는 싶은데 엄두가 나지 않아 밀쳐 놓은 책일망정 그때만큼은 사랑스러운 눈길을 보내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보기에 참으로 묘한 것이 있다. 문자는 범람하는데 글은 읽지 않고, 말로 해야 할 것은 글로 쓰는데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깜빡하면 대화내용을 놓치기 십상이던 TV드라마나 예능프로에 요즘은 자막이 안들어가는 경우가 없다. 우리말인데 자막을 달고 심지어 부연 설명까지 달려있다. 전화 요금이 비쌌던 한 세대 전만 해도 상대방이 끊기도 전에 끊을 만큼 '용건만 간단히'가 생활화 됐었는데 통화료는 공짜나 마찬가지가 된 지금은 굳이 문자와 채팅으로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 정작 출판 산업은 정책적인 배려없이는 몰락하기 일보직전이고, 대하 소설은 앞으로 기대하기 힘든 형편이다. 긴 호흡의 글이나 문자는 결벽적으로 싫어하면서 동강낸 글은 아무 의미없이도 몇 시간이고 찍어대고 있다. 오죽하면 신조어라는 것들이 영어 이니셜처럼 앞글자만 따서 단축된 것들이 대부분일까.
누구는 말하듯 쓰면 된다고는 하지만 실은 부담스럽고 어려운 작업이다. 그에 비하면 읽은 책이나 기사를 말로 전하는 게 쉽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직접 쓰지 않은 한 다른 사람의 글을 말로 옮기는 과정에서는 변이나 누락이 발생하기 쉽다는 것이다. 말을 함축하고 정제한 것이 글이니 이를 다시 말로 전환할 때에는 이전의 상태로 환원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먹기 좋은 액상의 말을 수분기 없는 고체 상태의 글로 만들었는데 이를 다시 원래의 액상으로 바꾼다는 게 쉬울 수가 없다.
하기야 요즘은 액상의 말에 불순물을 타기도 하고 성분마저 바꿔서 글을 만드는 기술자들이 많은 세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약을 기막히게 잘 제조한다고 해서 그들에게 자격증을 주고 연구원으로 선발하는 나라는 없다. 말이 좋아 기술자지 실은 범죄자다. 세상 소식을 글로 제조하는 기술자는 '술'자를 뺀 기자다. 한글의 위대함에 감탄하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불순물을 많이 타고 성분을 바꿔도 처벌이 쉽지않은 범죄자이기도 하다. 그들 가슴에 기자증이 달려있고 정치계나 학계로 진출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은 걸 보면 우려스러울 때가 많다.
인터넷과 스마트 폰이 우리 생활속에 깊숙히 파고 들었다. 지구 반대편 소식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고, 생면부지의 사람과도 대화가 가능한 세상이 열렸다. 누구나 자신의 견해나 주장을 펼 수 있는 장이 도처에 열린 것이다. 대부분 동영상이나 텍스트로 이루어진다.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듯 유효한 반면 해악이 되기도 한다. 세상과 척을 지지 않고 사는 한 개인의 지적 소양과 윤리 의식은 날로 중요해지고 선택과 판단의 순간은 더 많이 닥친다.나 역시 예외일 수는 없어서 가려 듣고 찾아서 읽으려고 한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다보면 존경심이 생길 때가 있다.
그런 글은 일관성과 전문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번째는 중요하고 가치있는 하나의 아젠다를 두고 일관성 있게 쓰는 사람의 글이다. 또 하나는 전문가가 자신의 전문영역에 관해 공익적 차원에서 글을 쓰는 경우다. 그런데 유의할 점이 있다. 일관성이 있더라도 맹목적이고 배타적이어서는 안된다. 높은 수준의 전문성을 지녔더라도 작위적이거나 배려심이 결여되어 있으면 곤란하다. 일관된 견해를 가졌다고해서 다른 가능성과 오류를 배제한다면 스스로 매몰되어 고립되기 마련이다. 자신의 전문 지식을 과시하기 위해 비판적인 자세만을 고수하고 현학적인 어휘를 구사하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 그런데 의외로 많다.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굴절하는 정도의 차이에 의해 무지개빛으로 분리된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 역시 시공간에 지나가며 조건이나 환경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분리된다. 빛이 굴절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진동수가 달라서다. 즉 빛은 입자이자 파동이라서 빛마다 고유의 진동수가 있다는 것이다. 인생 역시 조건이나 환경이 달라지는 것은 교육이나 경험을 통해 형성된 생각의 차이 때문이다. 인간 역시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생각들이 다양한 무지개 빛으로 나뉘게 되게 하는 것이다.
빛이 진동수에 따라 색이 바뀌듯 소리는 진동수에 따라 음이 바뀐다. 인간은 결국 생각에 따라 말과 행동이 바뀐다. 그런데 다양한 색깔의 무지개 빛을 렌즈로 모아 프리즘에 반대로 보내면 흰빛으로 되돌아온다. 인간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역으로 거슬러 모아보면 역시 하나의 점으로 귀결되지 않을까 싶다. 그 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시대나 분야 그리고 학자마다 조금씩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을 뿐인데 하나라는 것만은 믿고 있다.
예전에는 유선이던 이어폰이 대부분 무선으로 바뀌었다. 유선전화기도 무선으로 바뀐지 오래다. 모든 물체는 고유의 진동수를 가지고 있다. 고유진동수에 맞춰 진동을 가하면 증폭된다. 이것이 '공명'이다. 인간도 고유진동수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 맞춰 진동을 가하면 증폭이 될텐데 나는 이것이 '공감'이 아닐까 싶다. TV나 라디오 채널을 선택해서 시청하거나 폰으로 원하는 사람과 통화를 할 수 있는 것도 고유 진동수를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채널을 돌리거나 다른 번호를 누르면 그 고유 진동수가 바뀌어 다른 방송을 듣게 되고 대화 상대가 바뀐다. 나는 인간도 채널을 돌려 서로의 진동수가 맞춰야 상대가 보이고 말이 들릴텐데 나는 이 순간부터 '소통'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사람마다 채널 수가 다를 것이다. 채널이 많을 수록 유연한 태도를 보이고 포용력이 넓을 것이고, 몇 개의 채널만 있으면 고지식하고 소견이 좁아질 수 밖에 없다. 이 채널 수를 늘리기 위해 책을 읽고 영화를 보기도 하고 여행을 하는 것 같다. 채팅에만 열을 올리고 대화에만 관심을 보이는 것은 결국 주파수를 맞추려고 채널만 열심히 돌리는 행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무래도 중요한 건 채널 수를 늘리는 일이다. 글은 더 신중해져야 하고 책은 가까이에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