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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Feb 10. 2021

좋은 학생, 낯뜨거운 교수

모레가 설날이다. 코로나로 조촐하게 지내게 될 선친의 차례가 될 것 같다. 달필은 아니지만 정성스레 지방(紙榜)을 쓰는 날이기도 하다.
나는 일반적인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대신 현고교장부군신위(顯考校長府君神位)라고 쓴다. 평생을 교직에 몸담으셨던 덕이다.
내가 죽고 난 다음 일이라 내 자식은 제사를 지내기나 할런지 모르겠지만 내 제사를 지낸다면 '학생(學生)'을 써야 할 것이다.

우리들 중 대부분은 죽는 날까지 공부를 마치지 못하는 학생이라는 의미일텐데 그렇다면 '공부는 왜 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왜 사는가? ' '왜 책은 읽어야 하나?'처럼 누구나 공감할 명쾌한 답변을 내놓을 수는 없는 어려운 질문이다. 다만 자신만의 답은 존재하는 것 같고 나 역시 찾아가는 중이다.
학생으로 이번 생을 마칠 게 분명한 나는 공부하는 자세만큼은 잃지 않으려고 한다.

공부하는 자세는 세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번째가 피상적 학습자(Surface Learner)인데 알고 싶은 것만 알면 된다고 생각하는 단계다.
단순한 사실이나 과정만 습득하려고 하고 지식의 의미과 창의적 발상에는 무관심한 태도다. '수박 겉핥기'와 같은데 아쉽게도 다수가 여기에 해당한다.
두번째는 전략적 학습자(Strategic Learner)다. 성적이나 성과와 같은 목적을 두고 공부하는 단계다. 자연히 시간관리와 효율성 중시하고 단기적 기억과 점수획득에 집중한다. 평생을 좌우할 깊은 지식이나 통찰력 그로인한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하니 창조적 역량을 갖추지도 못한다. 우리가 간혹 만나는 기만적 자기우월성에 빠진 전문가나 지식인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는 심층적 학습자(Deep Learner)다. 근본적인 의미를 탐구하는 단계다.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합치고 맥락과 배경을 이해해서 원리를 파악하려는 비판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다. 이제 갓 한글을 깨친 할머니의 시에서 느끼는 감동 혹은 어릴 적 무릎을 베고 들었던 옛날 이야기에서 그 원류와 의미 철학까지 파고드는 작품을 남기는 작가들에게서 볼 수 있다. 다양한 SNS와 각종 인터넷 매체에서 탁월한 식견과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 울림을 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이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흔하게 이웃으로 만날 수 있으면서도 깨달음의 경지에 가까이 간 사람들을 보게 되면 반갑다.
<켄 베인/ 최고의 공부(What the Best College Students Do)>

나 역시 무력하고 나약한 사람이라 쉽지는 않겠지만 심층적 학습자로서의 자세를 잃지않는 학생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은 것이다.
전신이 뇌로 가득차도 수용 못할만큼의 정보와 지식, 사실과 주장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원시인류의 뇌 용량 그대로 살아가기에는 모두가 버겁고 힘들다. 거기에 더해 가족이나 친구 혹은 생계와 직간접으로 관계된 일이라면 나 역시 내 판단과 선택마저 믿지 못한다.
생존에 민감하고 본능을 떨칠 수 없는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자신의 생각이나 믿음을 재점검하고 수정하려는 노력까지 하지않는다면 자신을 모독하고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깨달음까지 얻지는 못할지라도 그 길을 찾고자 하는 열의,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닐까 돌아보는 회의, 걸음을 멈추지 않으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면 최소한 술취한듯 갈짓자로 인생을 낭비하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 사회는 의도나 목적이 도덕이나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면 공부를 할수록 지식이 쌓이고 그에 합당한 대우와 존경을 받기 마련이다. 남보다 앞선 지식으로 돈을 벌고 높은 수준에 달하면 이름을 알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식과 깨달음은 분명 다른 것이다. 지식이 외부에 있던 것이 내 안에 자리잡는 것이라면 깨달음은 내 안에 축적된 것이 숙성되고 정제된 무언가다. 그래서 마침내 감출 수 없는 은은한 향처럼 밖으로 번지는 것이다.
지식이 수많은 책으로 가득한 서가라서 필요에 따라 꺼내 볼 수 있는 것이라면 깨달음은 그 책들의 정수를 자신의 것으로 체득한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아우라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식인들이 있다. 분류하고 체계화하길 즐기는 현대사회에서는 그 등급을 나누고 그에 합당한 명찰을 달아준다. 그런데 인류에게 해악을 끼치거나 그릇된 길로 이끈 사람들은 무지한 군중이 아니라 지식인들이었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특히나 학문을 중시하는 유교 영향권의 우리나라에서는 사회 전반적으로 직업이나 학위에 의해 명명된 전문가나 교수들의 폐해가 심각한 것도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일본의 군국주의에 논리를 제공, 무수한 죽음을 부른 것도 우직한 백성이 아니라 선택 받은 머리들이었고 좌우익 동족상잔의 명분을 준 것도 지식이었다. 현재 우리나라가 앓고있는 수많은 비리와 부조리 또한 먹물들에게서 번진 것이다.
이러한 폐해는 대개 자신의 이익이나 관점에 치중할 때 일어나는 경우가 많은데 거짓기사를 서슴치않는 기자나 독재권력 옹호나 4대강 개발에 앞장섰던 교수가 쉬운 예가 될 것이다.
이전에도 거듭됐었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어 걱정스럽다.
사실과 의견을 구별하지 않고 밥그릇에 연연해 왜곡과 과장을 서슴치않는 기자들이 횡행하고, 사적 이익이나 출세를 위해 학자적 양심이나 알량한 권위를 파는 교수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지식과 정보를 띄워서 토네이도를 일으키는 자들이 그들이다.
글을 깨치고 말귀를 알아듣는 다수의 서민들로서는 중심을 잡고 살기가 더 어려워졌다. 차라리 산에 들어간 자연인이거나 문맹이라면 이러한 광풍에서 벗어나거나 그 중심에서 고요할 수 있을텐데 현실에서 보이고 들리니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날이 갈수록 극단으로 치닫는 주장이나 의견 사이에서, 새롭게 발견하고 알게된 지식과 사실이 난무하는 가운데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중심을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자본주의 국가에서 편향성은 이익이 되는 장사라서 더욱 극성이다.
우리들 역시 각자의 경험이나 이익 혹은 사적 관계가 연관되어 있다면 자신조차 믿을 수 없게 된다. 이럴때 새로운 정보에 보다 쉽게 접근하거나 지위나 권위, 지적 높은 수준에 이른 그들의 말에 현혹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들은 '기만적 자기우월성'에 빠져 있을 확률이 높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스스로 많이 배우고 알고 있으니 자신의 견해가 맞다고 착각하는대다 과시할 사회적 완장이나 명찰까지 달았으니 쉽게 오만에 빠진다. 그래서 오류가 드러나더라도 쉽사리 인정하려 들지않고 오히려 확증편향에 빠지는 것이다.

'제국의 위안부'를 쓴 한국 대학 교수와 위안부 피해자를 '자발적 매춘부'라고 한 논문을 쓴 하버드대 교수의 뉴스를 접하면서 조금은 측은했다.
그들조차도 지식으로 딴 완장을 두른 채 자신의 이익에 복무하는 편향적인 지식인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책의 어느 부분, 말의 일부만을 도려내어 자극적 제목과 선동하는 기사를 쓰는 것도 삼가해야겠지만 자신이 편향된 것은 아닌지 회의와 비판에 인색한 지식인은 더 문제다. 적어도 일반 대중은 이들과 학문적으로 토의할 지식은 부족하고 사실관계를 따져 공박은 할 수 없을지언정 정작 숨은 의도나 성향은 귀신같이 파악한다. 기만적 자기우월감에 빠진 식자층이 쉽게 간과하는 경향이 있을 뿐이다. 영어가 딸리기도 하려니와 내 나라 사람 건사도 못하면서 근본없는 양코배기와 입씨름 할 수는 없고 박유하는 그만 입을 다물었으면 좋겠다.
박유하. 그녀가 어떤 자료로 무슨 말을 하든지 머릿 속에 든 생각만큼은 해파리 내장처럼 잘 보이니 이제 그만 독수를 거두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나마 이렇게 흐느적대는 것은 수온이 상승한 탓이고 산호가 석회가 될만큼 우리 바다가 오염된 덕인걸 알아야 한다.
미처 거두지 못한 반세기 전 쓰레기더미 속에 핀 곰팡이같은 그녀가 전장의 사내들이 어떠할지, 진정한 수치심이 무엇인지  알기나 한지 모르겠다.

버트런드 러셀은 "지식은 조금도 틀림이 없는 생각이 아니라 틀림없을 것같은 의견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했다.
의견에 불과한 지식을 신념으로 여긴다면 교조화되는 길밖에 없다. 대중의 지탄에 귀를 막기보다 자신이 우월감이나 확신에 경도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무지 때문에 궁지에 몰리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확신 때문에 궁지에 몰린다" - 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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