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성훈 Feb 15. 2021

수레바퀴

2021년 2월 15일. 기온을 보니 영하 2도다. 지금으로부터 46년전 오늘은 더 추웠던 모양이다.

" 1975년 2월 15일은 낮 최고 기온이 영하 7도였다.... 김지하는 1975년 2월 15일 밤 아홉 시 사십 분께 형집행정지로 영등포 교도소에서 출감했다.....나는 보았다.... 교도소 정문 맞은편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웬 허름한 여인네가 포대기로 아기를 업은 채, 추위 속에서 웅크리고, 저물어 가는 교도소 정문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여인네 옆에는 영업용 포니 투 택시가 한  대 정차해 있었는데, 그 여인네가 출소자를 마중하기 위하여 대절한 택시였다....
나는 김지하에게 바싹 붙어서 취재를 하면서도 교도소 광장 건너 언덕의 어둠 속에 서 있는 그 아이 업은 여인네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김지하가 무등을 타고 아우성을 치며 광장을 휩쓰는 동안에도 그 여인네는 어둠 속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 여인네는 다만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바다의 기별 / 김훈 >"
지켜 본 기자는 김훈이었고 어린 것을 업고 있던 허름한 여인네는 박경리(1926~2008)다.

젊다고 강변하고 싶지만 결코 젊지않은 나이가 되어서 다행일 때도 있다. 예전같으면 천둥소리처럼 들려 화들짝 놀랐을 일에도 움찔할 뿐이고, 벌써 말이 앞서 튀어나갔을텐데도 한번 숨을 고르는 여유를 가지게 됐다.
백기완의 부고를 접하고 먼저 든 생각은 이런 것들이었다.
'이제 당신 대의 사상과 철학, 운동은 명맥이 끊긴건가? 당신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는 뭐지?'
'처음 당신 이름을 듣게 된 날로부터 오늘까지 나는 어떤 인식변화가 있었고 지금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지? '
'나는 수많은 깨짐과 실수를 반복하면서 지금 어디쯤에 머무르고 있는걸까? '

곰곰히 색바랜 신문기사 스크랩을 펼치놓듯 시간여행을 떠나본다. 나의 추모 방식이다.
내가 함석헌과 백기완. 어느 이름을 먼저 알게 됐을까? 아마 함석헌이었을 것이다. <뜻으로 본 한국사>를 읽기 전에 '씨알'이란 말을 먼저 들었던 것 같다. 어디서 언제쯤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대학입학 전이었다. 책을 읽으며 두근대던 심장소리와 쥐었던 손아귀의 힘을 기억한다.
백기완은 대학에 들어간 이후에야 이름을 들었고 1987년 첫 대선 도전이 인상에 강하게 남아있다.

내가 두 사람을 떠올린 것은 '함석헌(1901~1989), 장준하(1918~1975), 문익환(1918~1994), 계훈제(1921~1999)' 그리고 백기완(1932~2021.2.15). 이 다섯 사람은 생전에 부모와 자식 혹은 형제 이상의 돈독한 관계기도 했지만 내 머릿 속에는 한 카테고리로 정리되기 때문이다.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민족주의자, 사회운동가, 사상가, 저술가 그리고 한 시대를 대표하는 존경받아 마땅한 이제는 조상이 된 사람들이다.

한국이 낳은 위대한 사상가이자 문필가였던 함석헌은 장준하가 창간한 <사상계>의 주필이기도 했으며 평생의 동지였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의문사한 장준하의 비보를 듣고 그는 " 땅이 온통 꺼지고 하늘이 무너진 듯 하다."고 비통해했다.
열렬한 독립운동가이자 김구선생이 아끼던 비서였던 장준하는 5.16이후 민주화에 앞장서는 국회의원이 된다. 베트남 파병에 강력 반대한 그였음에도 파병결정이 나자 "남의 아들을 총알받이로 전쟁터에 보내고 내 아들은 안 보내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빽을 써서 아들을 베트남에 파병보낸다. 우리나라에서 그 귀하다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것이다. 당시 박정희는 입시정책까지 바꿔서 박지만을 육사에 입학시켰고, 참전을 적극 지지한 여당 공화당 의원과 고위공직자 중에 아들을 베트남에 파병시킨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장준하와 일본 유학시절을 함께 한 절친한 친구들이 시인 윤동주(1917~1945)와 문익환이다. 윤동주와 문익환은 독립운동의 산실 만주 명동촌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다. 윤동주의 외삼촌은 명동촌의 정신적 리더인 독립운동가 김약연이고, 안중근(1879~1910)은 거사전 문익환의 집에 기거하며 사격연습을 했다.

계훈제는 장준하와 민족학교였던 신성중학교 동창이자 친구였다. 독립운동부터 시작하여 반유신투쟁에서 1987년 6월항쟁까지 그리고 이후에도 민중운동에 앞장섰던 계훈제는자신의 말처럼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아도 거짓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끝없이 반항했고, 그러다 보니 항쟁으로 일관하며 항자로 지칭하고 자족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1970년부터 함석헌이 발행하던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을 맡기도 했다.
그들은 이렇듯 얽기도 설킨 한 몸뚱아리와도 같았다.

이미 작고한 네 분과 평생을 함께 했던 막내격인 백기완선생이 세상을 뜨신 것이다. 백기완의 조부 백태주는 일찌기 탈옥한 김구를 피신시키고 돌봐줬던 지역 유지이자 독립운동가였다. 부친은 기자로 재직한 인텔리였지만 조부가 독립운동으로 옥사한 후 급격히 기운 가세 탓에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그는 독학으로 문학과 역사 그리고 사상을 깨쳤다.
김구에게 깊은 영향을 받고 함석헌을 비롯한 네 분과 함께 반일, 반독재, 민주화, 노동 운동의 최전선에 섰으며 수없는 옥고를 치루고도 뜻을 굽히지 않는 열혈 청년의 모습 그대로 우리 곁을 떠난 것이다.
새벽 4시 45분 그토록 사랑하던 조국과 겨레의 동이 트는 걸  보지 못하고 끝내 눈을 감으셨다.

1975년 2월 15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더 늦게 출감한 이가 백기완이다.
" 백기완은 밤 열한 시께 석방 되었다....그런데 교도소 당국의 설명은... 벌금 십만원을 납부하지 않으면 석방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이 교도소 담 밖에 알려지자 즉각 모금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군중들인, 기자와 학생들 대부분이 김지하를 뒤쫓아서 빠져나간 다음이었다. 사람이 없으니 모금이 될리가 없었다. ....
그때 나는 또 박경리 선생을 쳐다보았다.... 그분은 아이를 감싼 포대기의 앞섶을 뒤적거리더니 만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냈다. 그러더니 가까이 있던 웬 대학생을 불렀다. "학생, 이 돈을 좀 보태보시오"라고. 다만 그렇게 그분은 말했다. 그리고는 그분은 대절해 온 택시에 몸을 실었다.....시간은 밤 열두시에 임박하고 있었다. 만원 짜리 몇 장을 내놓고 그분은 다만 잠든 어린애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도 그분을 뒤쫓아 가는 사람은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신문사에 돌아가 마지막 기사를 작성했다. 나는 박경리에 관해서는 한 줄도 쓰지 않았다....나는 박경리에 관하여 쓸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쩐지 그것이 말해서는 안 될 일인 것만 같았다. <바다의 기별/ 김훈>"

나는 자신만이 지켜 본 박경리에 관해 쓰지못했던 김훈 선생과 기다리던 사위를 만나지도 못했으면서 백기완을 위해 꼬깃한 지폐를 건넸던 박경리 선생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사람이다.
안타깝게도 그리고 눈물을 솟구칠만큼 슬프게도 함석헌을 비롯한 다섯 분과 박경리같은 우리 시대 참어른들이 떠나가셨다. 가시덤불에 찔리면서도 거친 돌밭과 데일듯한 열사(熱沙)의 시대를 뱃가죽으로 쓸어 흔적을 남긴 분들이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 윤동주의 중학교 동기였던 김형석과 함석헌이 주례를 섰던 고은, 박경리의 사위 김지하. 그들의 부음에 나는 어떤 마음일지 궁금해진다.
아무래도 문학계의 거두로 행세하며 온갖 패악과 성폭력을 일삼고 박경리 선생을 '자신의 말을 안듣는 과부년'이라 했다던 고은은 논외로 해야겠다.
세상을 데우고 고운 재로 사라지는 것이 있는 반면 시꺼먼 그을름만 내뿜고 눌러붙는 비닐 봉지도 있는 법이니까...

작가의 이전글 이런게 2차 가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