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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Mar 23. 2021

시간이 멈춘다해도

워드로 '쉬흔'이라 썼는데 자꾸 '쉰'으로 바뀐다. 검색해보니 '쉬흔'은 방언이라고 나와있다.
'흔'은 섯 ㅡ흔(서른), 마ㅡ흔 (마흔), 쉬ㅡ흔(쉰), 여섯ㅡ흔(예순), 일곱ㅡ흔(일흔), 여덟 ㅡ흔(여든), 아홉ㅡ흔(아흔)' 에서 처럼 열 십(十)의 흔적으로 보여진다는데 유독 '쉬흔'만이 '쉰'이라는 한 글자로 축약된다.
그렇게 징검다리 밞듯 잠깐 밟고 지나가라는 뜻일까? 쉰에서 예순으로 건너는 고개마저 넘고보니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뒤돌아보게 된다.
'마흔'은 인파 속에서 어깨를 부딪친 것만도 못하게 내 기억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쉰'에는 무언가 붙잡을 줄 알았는데 어릴적 개울에서 송사리잡을 때처럼 움켜쥔 손을 펴보니 아무것도 없다.
'불혹'해야 했을 때 세상과 불화했었고, 지천명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그러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바닥이 닿지않는 시간의 강에서 허우적대다 이제서야 가만히 있어야 뜰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제는 이대로 흘러가야만 하는 건지 불안하고 초조하다.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지 못하도록 카지노와 백화점에는 시계를 두지 않는다. '욕망과 유혹의 공간'이다. 창문마저 없애서 바깥세상과 단절시켜놓은 이곳에서 사람들은 마음껏 욕망을 분출하고 유혹당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정작 잃는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이다. 돈은 다시 되찾을 기회가 있지만 시간은 그럴 수 없다. 그래서 망각의 심리학이 총집결한 공간인 것이다.
고통과 불안이 가득찬 공간에도 어김없이 시간은 흐른다. 호스피스 병동에 시계가 있을까 궁금해한 적이 있다. 병상 머리맡에 알람시계를 둔 환자들은 있을까?  '깨어남'이 곧 '새로운 탄생'이고 '생존의 확인'인 공간에서 울리는 알람소리는 어떤 의미일까?

간난아기는 잠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해 죽음의 본능적 공포때문에 잠투정을 한다고 했다. 노인이 될 수록 잠이 짧아지고 일찍 깨는 건 그 공포를 실감해서인지도 모른다. 잠을 밀쳐내서라도 아침을 당기고 싶은 본능은 쉽게 잠들지 못한다.
어둠은 잠을 부르고 잠은 죽음을 떠올리게한다. 에디슨의 전구가 세상의 어둠을 몰아냈다고해서 불안과 공포까지 밝히지는 못한다. 마음 속 등불을 켜야할텐데 어둠 속에서 스위치를 찾느라 더듬거리고 있는 것만 같다. 각자의 손전등을 마련해야한다. 하루하루 삶의 의미와 에너지로 충전되는 손전등말이다.  

잠을 안자고 살 수 없는 것처럼 알람으로 죽음을 깨울 수도 없다. 언제 초침이 멈출지도 모른다. 누구나 매일 다시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세상에 왔던 것처럼 예기치 않은 순간에 멈춘다. 아무것도 누구도 미리 알려주지 않고 깨울 수도 없다. 아침마다 새로 태어나 걷고 사랑하고 서로를 확인하고 죽음처럼 잠들어야한다

붙잡을 수도 없고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이지만 속도는 다른 게 분명하다. 행복한 순간은 유난히 짧게 느껴지고 고통스럽고 불안한 시간은 더디게만 흐른다.
절망과 좌절의 터널을 빠르게 통과하려면 희망이라는 엑셀레이터를 밟아야한다. 행복을 연장하려면 그 시간을 나눠 가져야 한다. 행복의 총량을 늘리는 방법이다. 원망과 증오보다는 사랑과 희망을 건네고 혼자 누리기보다 함께 나눠가져야 하는 이유다.
시간은 공평하게 흐르지만 사람마다 속도를 조절할 수 있고 질은 다르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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