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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Mar 31. 2021

슬기로운 PD생활

작품의 해석은 독자의 몫이고 깨달음은 언제든지 자신의 깜냥에 비례한다.
일상에서 접하는 사소한 일 예컨대 봄기운에 물러진 대지를 뚫고 고개를 내미는 새싹을 보거나 우연히 듣게 된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대화에서 삶의 정수를 발견하고 인생을 대하는 눈높이가 올라가기도 한다. 굳이 체화되지도,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변화시키지도 못하는 어려운 문장을 들고 씨름하거나 닿을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사람들의 범상치않은 언행에 감탄만 하는 건 그리 바람직하거나 효율적인 태도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대개 사막 끝닿는 어디쯤에 있을 오아시스를 그리거나 이미 완결성에 가까운 모델을 지향한다. 그런데 정작 자기 발 밑을 파서 우물을 찾는 게 빠를지도 모르고, 마주앉은 사람에게서 배울 점을 찾는게 훨씬 낫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한다.

예전에는 그러니까 2000년 밀레니엄이 시작되었을 즈음까지 경박하게 여겨지고 바라보는 시선도 곱지않아서 천대받던 예능PD출신으로 성공한 두 사람이 있다.
<1박2일>  조연출로 시작해서 <삼시 세끼> <신서유기>등을 히트시켜 수십억 연봉의 주인공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던 나영석과 그와 동기이면서 예능으로 시작해 <응답하라>시리즈, <슬기로운 OO생활>시리즈를 연출한 신원호다. 나는 족히 열살 아래인 그들의 말 그리고 태도에서 많은 가르침을 얻고 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두 사람 모두 과장이나 가식이 없다. 그리고 겸손이 몸에 배여있다.

프로그램의 성공요인을 묻자 나영석은 쭈뼛거리며 이렇게 말한다.
“욕먹더라도 내가 잘하는 걸 한다. 솔직히 말하면 시청률이 관건인데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 프로그램에 자신의 직과 커리어, 모든 걸 걸고 있지않느냐” 그래서 다른 걸 시도하더라도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걸 하고 캐스팅도 시청률을 감안해서 한다고 했다. 솔직하고 담담하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 대한 대비책을 말할 때는 “모르겠다. 사실 나도 요즘 TV를 잘 안보더라. 걱정이다.”라고 한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지혜와 용기를 모두 갖춘 사람이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기대를 하니 그 칭찬이 반대로 돌아올 수도 있겠다 싶어 점점 새로운 시도를 주저하고 방어적으로 변하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 고민스럽다”는 그는 얼마전 윤여정의 “너는 크게 실패해봐야 진짜 좋은 인생이 열릴거야”라고 했던 말을 곱씹는 중이다.
오랜세월 함께 한 강호동이 노란 타이즈차림으로 코끼리코를 도는 모습을 보며 “문득’천하장사에서 연예계로 진출해 많은 부침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정상에 섰을텐데 어떻게 자기 자신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옛날에는 대단한 사람이 대단해보였는데 요즘은 오랫동안 꾸준한 사람이 대단해보이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됐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예능프로그램처럼 사소한 것에서 큰 걸 캐는 사람이다. 그가 선망의 직업이 된 PD지망생에게 들려주는 얘기는 간결하고 실전적이다.
“첫째는 하고싶은 게 분명히 있어야 한다. 둘째는 그 생각을 언제든 바꿀 수 있다는 각오를 해야한다.” 는 것이다. 취업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에게 이보다 강렬한 메시지가 있을까.

신원호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조곤한 목소리로 밥상에 올리는 숟가락론을 펼친다.
“연출하는 사람이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카메라, 조명 그렇다고 연기를 하거나 웃기지도 못하죠. 각본을 쓰지도 않습니다.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건 없는데 그냥 이걸 책임지는 사람이죠. 그냥 책임지는 사람이다보니 다 빌려 써야하는 입장이잖아요. 그러니깐 모든 스탭들에게 감사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행운이고 감사한 건 좋은 작가를 만난 거죠. 드라마는 대본이 다예요. 이렇게 재밌고 따뜻한 글을 쓰는 작가를 만나는 건 기적 같은 일입니다. 그 인연이 없었다면 저도 없었을 겁니다.” 그의 말을 들으니 나는 그냥 나이만 먹은 것 같아 부끄러워진다.
최근 방영을 앞둔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언급하며 전문적인 분야를 드라마에 담기위해 애쓴 작가들의 고충과 공로를 치하했다. ‘슬기로운..’이란 제목을 달게 된 것도 전문적이지만 일상처럼 남아있는 사람들의 드라마가 되고 싶다는 바램에서 나왔다고 했다. ‘사람들이 사는 드라마’를 추구한다는 의미이고 으레 기대하거나 짐작하는 그런 부분이 없다는 걸 암시하고 싶었다고 했다. 밤낮이 바뀐 PD직업을 가진터라 가족 특히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지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그는 개인적으로 “너무 치열하게만 살았던 게 아닌가싶어 진짜 원하는 가치를 찾아가면서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고 했다.
재미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얘기하고 싶은 그의 드라마처럼 그의 바램도 인간적이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명사의 말을 인용하지 않아도, 철학과 인생론을 펼치지 않아도 그에 못지않은 인생의 진수가 담겨있다.

나는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보다 갈대는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는 말이 더 좋다.
바람에 순응하고 화려한 꽃망울을 터뜨리지 않아도 한데 어울려 아름다운 석양을 붓질하는 갈대.
삶과 죽음, 정의, 진리, 사명, 이데올로기와 같은 거대담론에만 매몰되기에는 우리 수명이 너무 짧고 기약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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