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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Apr 09. 2021

범종과 풍경소리

언뜻 50대 중반을 넘어섰다. 이 나이 되도록 변변하게 해놓은 것도, 아는 것도 없다. 그래도 마냥 나이 헛먹은 건 아니구나 싶어 위안하게 될 때가 있다.
젊었다면 미처 알아듣지 못했거나 그동안의 거듭된 실패와 오류의 경험치가 없었다면 깨닫지 못했을 것들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아마 내가 상소풍을 마치는 날까지 가방에서 꺼내 버리지 않을 말과 깨달음이 있어 늙어가는 게 그나마 억울하지만은 않다.

그것 중에 ‘제대로 아는 사람은 먼 데를 가리키고, 깊은 사람의 목소리는 늘 낮고 조곤하더라’라는 깨달음이 있다.

세상이 소란스럽다. 언제 조용했던 적이 있었을까만은 다툼은 더해만가고 소음은 더 날카롭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다툼이란 게 자잘하기가 깨알같고, 소음은 고장난 메가폰처럼 알아들을 수가 없다.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이라더니 ‘소잡하고 확대된 불행’도 있다.
제대로 아는 것이 없어서 그렇고, 얕아서 그렇다. 진정 알아야 할 것은 모르는 자들이,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얕고 가벼운 자들이 아는 체는 하고 싶어 악다구니를 쓰니 그럴 수 밖에 없다.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란다. 행복한 삶을 꿈꾼다. 1930년. 대공항으로 직결된 증권시장 붕괴가 일어난 다음해. 근사한 차림을 한 어떤 남자가 저명한 철학자를 찾아왔다.
자기가 살아야 하는 ‘타당한 이유 한가지’를 알려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노라고 말한다. 철학자는 그 남자를 돌려세울 만한 납득한 답을 주지 못했다. 철학자는 이를 계기로 진정한 행복의 키를 찾아나선다. 그가 쓴 책이 <어떻게 나답게 살 것인가 / 에밀리 에스파히니 스미스>다.
나는 그가 알아낸 ‘의미있는 삶’과 ‘유대감’에 주목한다. 엄청난 부와 끊없는 욕망이 ‘의미’를 대신할 수 없고, 혼자 행복한 건 가짜행복이고 채워지지 않는 허기진 삶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머리에서 가슴까지다. 일찍이 그 중요성을 일깨우고 방법을 일러주고 가신 분이 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틀을 깨뜨려야 합니다. 우리들의 생각을 가두고 있는 틀을 깨뜨려야 합니다. 우리들의 생각은 대부분이 주입된 것입니다.
우리의 꿈과 환상까지도 그 사회의 지배권력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은 망치로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발로 걸어가야 합니다. 꿈보다 깸이 먼저이어야 합니다. 자유와 인권의 역사, 변화와 진보의 역사는 언제나 탈문맥(脫文脈)의 도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빼거나 더할 게 없다. 웅변하지 않아도 들리고 귀기울지 않아도 파고든다. 철학서는 읽지만 다 이해못하는 아둔한 나 같은 사람은 ‘철학’이란 말을 ‘공부’로 바꾸면 된다.

생각하지 않는 인간은 시체와 다를 바 없다.
망치로 자기부터 깨야하는데 사시미칼을 들고 설치는 자들이 많다. 어설프게 배웠으면서 아는 척은 하고  싶은 자들이다. 쥔 칼은 ‘메스’라고 우기고, 남을 해꼬지하는 것은 ‘수술’이며 ‘치료’이라고 변명한다.
그들이 장단을 무시하고 깨질듯이 쳐대는 괭과리 소리와 시도 때도 없이 내키는대로 불어대는 나팔소리에 잠자리마저 뒤숭숭하다.
요즘 시대는 전파를 타고 안방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들을 수 있다. 손에 쥔 문명의 이기때문이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자연은 안식처이자 영험한 치유력을 가진다. 바람이 건드리는 산사 처마의 풍경소리가 상스럽고 시끄러웠던 적이 있던가.
일년에 몇 번 종각의 범종을 때린다고 온 산이 화들짝 놀라고 깨어나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런 소리가 은은하고 낮게 속세의 때를 밀어낸다. 그들이 하는 짓은 패악에 불과하고, 복채를 바라는 무당의 요령소리에 다를 바 없다.

신체적인 나이는 더해가지만 나는 젊어지고 있다. 자기반성으로 젊은 사고방식을 유지하려고 한다. 뼈는 굳어질 지언정 변화를 받아들일 유연성은 키우고 있다. 그렇게 늙어가지만 젊어지려 한다.
나는 나를 받들겠다는 자를 경계한다. 모름지기 깨어있는 시민이라면 우러러 모시겠다는 자와 그 세력을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진정이라면 낮은 곳,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 아직 우리 시대, 우리나라에는 드문 게 사실이다. 입으로만 모시고 필요할 때만 엎드린다. 영악한 머슴이 조아리길 잘하고 가산을 털어 야반도주한다. 집안에 망조가 들면 그런 자를 들인다. 나라에도 그런 자들이 차고 넘친다.

분별력은 생각하는 힘에서 나온다. 국민이 주인으로 대접받고 그 명을 지엄하게 받들도록 하려면 더 현명하고 깊어져야 한다.
멀어 보이지만 모두의 바램은 하나다. 행복한 삶이고 그 삶은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머슴을 부리려면 주인이 더 깊이 생각하고 어김없어야 한다. 그래서 속일 엄두조차 못내게 해야한다.
평범해보이지만 쉽지만은 않다. 그런 노력조차 하지않는다면 불안해하며 골목을 지나 다녀야하고 끊임없는 소음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 매일 동네에 떠도는 소문에만 일비일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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