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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Jul 05. 2021

F=ma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두가지 변화가 일어났거나 일어나는 중이다. 하나는 말보다 글이 편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말을 하면서 뜸을 들이는 예전에 없던 버릇이 생긴 것이다. 내 안에서 미세하게 감지되는 변화라서 굳이 밝히지 않으면 남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지만 나로선 신선한 바람이다. 이 둘은 실상 한 줄기에서 돋아나는 두 잎사귀이다. 말의 절제가 부족하고 때론 격정적이어서 돌아서면 후회하는 숱한 날들이 퇴적해서 거름이 된 것이고, 다 알 수도 없지만 당연하게 생각한 것조차 실은 잘못된 것이었던 쓰라린 경험이 옹이로 박혀 생긴 것이다.

그러다보니 섣불리 말을 하기를 주저하게 된다. '이 단어가 적절한가? 정말 확실한 건가?' 생각이 많아지니 시간을 끌게된다. 잠깐 말을 멈추고 스마트폰이건 뭐건 꺼내 확인해도 무관한 사이라면 다행이다. 그렇지못한 상황에서는 뜸을 들이게 된다. 더구나 중요한 선택과 결정을 해야하는 공적 자리에서의 발언은 더욱 그러하다.

그나마 한번 뱉은 말은 시간이 흐르면 종적도 묘연해지고 실체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설사 누군가 필사를 했다더라도 당시의 정황, 감정, 뉘앙스를 되살리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글은 좀체 사라지는 법이 없고 세월이 흘러도 뚜렷한 흔적이 남는다. 글이 말보다 부담을 덜어주는 장점이 있다. 확인과 검증의 절차를 선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이전에 알던 사실이지만 더 밝혀진 건 없는지,  유사한 사례나 자료를 검색할 수도 있고 적절한 단어의 용례까지 점검할 수 있다. 글을 좀더 편하게 여기게 된 데는 이런 영향이 가장 크지싶다.

대학 다닐 때 중국집 배달을 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한번은 대학 본관 앞 잔디밭을 그대로 질주해서 들이박는 사고가 났었다. 평소에는 핸들에서 두 손을 떼고서도 타고 다녔었는데 그 순간에는 통제를 할 수 없었다. 욕심과 자만심이 화를 불렀다. 맹렬하게 가속이 붙은 오토바이는 핸들을 꺾을 수도 브레이크도 말을 듣지 않았다. 작은 몸체 어디에 그런 폭발적인 힘을 감추고 있었던 것일까.

요즘들어 부쩍 원동기만 가속도을 가지는 게 아니란 걸 깨닫고 있다. 쉽게 다뤄지고 있지만 실상 말과 글은 무겁다. 세상을 움직일만큼 무한대의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말과 글도 가속이 붙으면 통제하기 어렵다. 그 힘 앞에 경건함을 잃지않고 버틸 수 있는 사람만이 통제할 수 있다. 더구나 말은 글보다 빠르니 더욱 조심스럽게 다뤄야한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인사들의 발언이 연일 구설에 오르고 글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의 필화가 잦다. 정제되지도 않은 말부터 뱉고 남 먼저 쓰려다보니 생기는 탈이다. 조급한 성정에 무식하고 게을러서 일어나는 일이다. 말과 글의 가속력을 주체하지도 못하면서 감히 나라를 그리고 대중을 움직이려드니 사건 사고가 잦을 수 밖에 없다.

오토바이 사고가 났을 때 상처의 쓰라림보다 쪽팔림이 더 컸다. 벌떡 일어나 쓰러진 오토바이를 끌고 절뚝거리며 식당으로 돌아올 때의 심정은 참담했다. 다들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괜찮냐?"란 말이 "내 그럴 줄 알았다."로 들렸다. 맨손으로 쓸어담던 짬뽕의 면발과 채 수습하지 못한 벌건 국물을 기억한다. 이후로 나는 오토바이를 두려워하고 멀리하게 됐다. 건더기는 쓸어담을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국물까지 어쩌지는 못한다. 말과 글도 자국을 남긴다. 어쩌면 짬뽕 국물보다 더 오래 그리고 선명하게 남는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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