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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Sep 11. 2021

밥과 술을 사는 사람

집요한 구석이 있어 호기심이 일면 직성이 풀릴 때까지 후벼 파고, 이후가 궁금하면 계속 쫓아가기를 멈추지 않는다.
사물과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데 그러다 쾌재를 부를 때도 있지만 '그러면 그렇지' 맥이 풀리는 경우도 있다.

2017년 발달장애자녀를 둔 어머니들의 무릎을 꿇게 했던 서진학교는 작년(2020년)에 첫 신입생을 받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감사하고 축하할 일인데 올해는 서울시 건축대상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 했다. 상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토록 아름답고 훌륭한 건물로 탄생했구나 하는 안도감과 교사 안을 누빌 아이들을 상상하니 감격스러워서다.

과정은 험난했고 갈등은 심각했다. 어머니들의 처절한 읍소가 없었던들, 사회이슈로 떠오르지 않았어도 가능했을지 의문이다.
내 기억으로 장애우에 대한 관심과 처우가 눈에 띄게 향상된 것은 자신이 장애로 불편했던 김대중 정권부터였던 것 같다. 정책기조에 반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점진적인 향상을 보이는 것만 같았던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에 대한 정책적 배려가 예상치 못한 강적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 서진학교 설립 건이다.
근시안적이고 인기에 영합한 정치가와 님비(NIMBY)로 불리는 지역이기주의가 결합된 강력한 저항에 부딪친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 정치가 끼어들면 왠지 불쾌해하고 식탁 밑에 기어다니는 바퀴벌레라도 본 듯 소스라치게 놀래거나 인상을 찌푸린다.
그런데 바퀴벌레는 부자집보다 가난한 집에 더 들끓는다. 그릇된 정치와 제도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그리고 큰 타격을 줘서 희망을 꺾어버린다. 누구도 정치를 외면할 수는 있어도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묘하게도 2017년은 정권이 바뀐 해다. 직전까지의 극우보수정권이었어도, 진보성향의 교육감이 아니었어도 서진학교의 설립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사랑많은 선생님과 좋은 환경에서 꿈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랐으면 좋겠다.

먼저 시작한 여당의 경선이 대구 경북을 거쳐 강원도에서 마무리 지으면서 1차선거인단 투표가 발표된다고 한다. 강원도에는 아름다운 도시들이 많지만 내 머릿 속에 먼저 떠오르는 지명은 아무래도 원주다.
원주에는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는 두 분의 선생님이 계신다. 안타깝게도 이제는 뵙고 싶어도 뵙지 못하는 박경리 선생님과 장일순 선생님이시다.
박경리 선생은 말년에 원주에 정착해서 생을 마감하시는 날까지 원주를 사랑하셨던 분이다. 박경리 문학관은 당신의 고향인 통영, 토지의 무대가 된 하동, 그리고 원주 이렇게 세 곳에 있는데 당신 동상 좌대에 새겨진 문구가 원주만 다르다. 통영과 하동에는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가 쓰여져 있지만 원주에는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왠지 떠들썩한 정국과 연관돼서 의미심장하다.

박경리 선생이 책으로 만나 뵌 스승이라면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직접 남기신 책 한 권 없지만 당신의 행적과 언행으로 흠모하고 따르는 스승이다.
장일순 선생은 원주 토박이로 평생 원주에서 세상을 아우르신 분이다. 만약 내게 누구를 닮고 싶고 어떤 삶을 살고 싶냐고 묻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장일순 선생을 꼽을 수 있겠다.
지금은 다듬고 깎아서 나아졌지만 성정도 급한데다 기고 아니고가 칼로 썬듯 분명해서 남을 적잖이 불편하게 하는 경향이 있는 나로서는 당신을 롤 모델로 삼는 게 당연할 지도 모른다. 장일순 선생의 삶 자체가 교과서이고, 가르침이어서 따르는 제자가 무척이나 많다. 아직도 당신을 기리고 유지를 받드는 사람들이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먼저 세상을 뜨신 장일순 선생이 박경리 선생과 직접 만난 기록을 찾을 수는 없다.
아마 박경리 선생이 원주에 정착한 1980년 이후로는 ‘토지’ 집필에 전념하느라 사람 만나기를 꺼리고 바깥 출입까지 삼가하셨으니 그럴 기회가 없었을 것도 같다.
언제나 찾아오는 사람이 들끓고 반기셨다는 장일순 선생과는 사뭇 달라보이지만 두 분은 공통점도 많다.
종교에 있어서 박경리 선생과 노자와 동학에 심취하셨던 장일순 선생 두 분은 모두 천주교 신자셨다. 토지의 배경이 되었던 하동에는 장일순 선생이 평생 스승으로 모셨던 해월 최시형의 증손이 산다. 장일순 선생의 사상적 제자라 할 수 있는 김지하는 박경리 선생의 유일한 사위다.
게다가 두 분의 사상과 철학은 궁극적으로 생명운동으로 맞닿아 있다. 장일순 선생이 세상을 떠나신 1994년은 박경리 선생이 역작 ‘토지’를 마무리 한 해다.

창조하기 위해서는 꿈을 꾸라고 하신 박경리 선생과 “낭만주의자여야 진정한 혁명가가 될 수 있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포기하지 말고 ‘로망(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장일순 선생. 반독재와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며 사상적 지주 역할을 하셨던 장일순 선생의 고장 강원도에서 어떤 경선 결과가 나올지 사뭇 궁금하다.

내가 인격적인 면에서 너무나도 닮고 싶은 장일순 선생의 일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 어느 날 한 시골 아낙네가 장일순을 찾아와 딸 혼수 비용으로 모아둔 돈을 기차 안에서 몽땅 소매치기 당했다며, 그 돈을 찾아달라고 장일순에게 매달렸다.
장일순은 그 아주머니를 돌려보내고 원주역으로 갔다. 가서 원주역 앞 노점에서 소주를 시켜놓고 앉아 노점상들과 얘기를 나눴다. 그러기를 사나흘 하자 원주역을 무대로 활동하는 소매치기들을 죄다 알 수 있었고, 마침내는 그 시골 아주머니 돈을 훔친 작자까지 찾아낼 수 있었다. 장일순은 그를 달래서 남아 있는 돈을 받아냈다. 거기에 자기 돈을 합쳐서 아주머니에게 돌려줬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 지은 뒤로도 장일순은 가끔 원주역에 갔는데, 그것은 그 소매치기에게 밥과 술을 사기 위함이었다.
그때 장일순은 소매치기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미안하네. 내가 자네 영업을 방해했어. 이것은 내가 그일에 대해 사과를 하는 밥과 술이라네. 한 잔 받으시고, 용서하시게"
앞으로 소매치기 같은 것 하지 말라든가 나무라는 말 같은 것은 일절하지 않았다. <무위당 사람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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