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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Mar 01. 2022

덮어놓고 살지마세요

겨울 굴이 듬뿍 들어간 콩나물 해장국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인근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켰다. 커피 장인이라는 주인의 프로필을 현수막에 내건 이 곳에서 정작 주인장을 본 적은 없다. 커피에 조예가 깊지 않은 내게는 그리 새콤하지도 쓰지도 않은 딱 적절한 맛이다.

커피는 향으로 마신다고 했던가. 그러고보면 나조차도 냉커피는 미숫가루 탄 물처럼 벌컥벌컥 마시면서 따뜻한 커피는 음미하듯 향에 취해 마신다. 보일듯 말듯한 김이 사그라지면서 겨울커피는 식어간다. 어느덧 잔은 바닥을 보이고 커피는 생명을 다한다. 커피향은 커피의 영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해장국 한 그릇으로 어제의 숙취를 가시고 커피 한잔으로 눈꺼풀에 매달린 잠을 떨치며 살아있음을 느낀다. 공복을 채운 포만감이 식곤증으로 전이되는 이 과정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계속될 것이다.

어제 저녁 오랜만에 가까운 지인들과 식사를 겸한 반주를 했다. "형. 그러지 마. 요즘 형 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안다. "그냥 내가 하고싶어서 하는거다." "그치 하고싶은 건  해야지, 하고 살아야지"  왠일인지 더 할만도 한데 그쯤에서 그친다.

내가 사랑하는 그 동생은 소리소문없이 내 SNS글을 빠트리지 않고 읽는다. 그리고 염려한다. 내가 자신을 걱정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동생은 박학다식하다. 그리고 다변에다 달변이다. 내가 본 어느 누구보다 호기심 많고 재능이 뛰어나며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다. 한동안 세상 소식에 귀를 막고 책 속에만 파묻혀지내기도 했다. 최근에는 몇 주간 강원도로 가서 논문을 쓰다가 돌아왔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도 삶의 무게는 만만찮고 현실이 드리운 그림자는 길기만 하다. 그가 보기에 최근들어 뒤엉켜 돌아가는 세상사에, 그것도 정치이슈에 몰입해있는듯한 내게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둘은 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내가 어떤 대답을 할런지도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건 젊은 날의 열정처럼 끓어올랐다가 잠잠해질 것임을....


오늘은 토요일이다. 내가 포만감과 식곤증으로 살아있음을 느끼는 동안에도 부고가 날아든다.

이어령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보게 된다. 예정된 죽음이다. 버릇처럼 이미 한번씩은 읽었을 생전의 인터뷰 기사들을 뒤적거린다. 포털 메인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걸려있다.

누군가는 교교히 죽음을 맞이하고, 또 어딘가에서는 죽음을 향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잠깐 스쳤던 우크라이나 군인 아빠와 헤어지는 어린 딸의 슬픈 눈망울이 떠오른다. 이어령 교수는 사랑하는 딸을 먼저 보냈다. 아빠를 전장으로 보내는 딸의 눈물과 아빠의 발렌타인 꽃다발에 감동한 시한부 딸의 환호가 중첩되어 어지럽다.


내 눈앞에서 죽음을 목도한 최초의 사건은 집앞 도로변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아이였다.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나는 걷고 있던 아이도, 거적으로 덮힌 아이의 운동화가 벗겨진 발까지 또렷히 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중간 장면이 편집됐으면 좋을 뻔 했다. 처참하게 찢어진 시체를 보고만 것이다. 한동안 그 아이의 시체가 잊혀지질 않았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을 알았던 것인지 아니면 그 형용을 떠올리기 싫었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그 사건의 충격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였다. '그 꼬맹이는 분명 천국에 갔을거야. 때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이었으니 어쩌면 다행이었을지도 몰라. 아니 분명 다행이었을거야'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사람의 육신이 별거 아니란 걸, 해체된 동물의 그것과 다를 바 없던 그 아이의 시체에서 깨달았다. 나를 있게 한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고 무감한듯 시신을 대할 수 있었던 것도 실은  차갑게 식은 육신에서 당신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짧게는 3개월이라고 했는데 1년 반이나 내 곁에 계셔주셨음을, 그 어느 시기보다 가장 가깝고 다정할 수 있었던 시간이 주어졌음을 감사해하고 또 감사해했다. 생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어령 선생도 시한부 선고를 받은 딸이 가장 오래 머물었던 한국에서의 1년을 추억했다. 가장 충만한 시간이었다고도 했다. 살아있음이 축복이고 의미다.


해장국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건 행위다.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살기 위해 반복하는 습관과 같은 것이다.

온기가 남아있는 커피에서만 향이 피어오르듯 영혼 없는 삶은 식어버린 커피와 같다. 이어령 선생은 세상에 당신의 향기를 남겨놓고 생명의 잔을 기꺼이 비웠다.

덧없이 살았다는 말은 영혼없이, 향기 없이 살았다는 말이다. 당신이 떠난 오늘 덧없이 살지는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아울러 어린 딸이 전장터로 향하는 아빠의 뒷모습을 그만 봤으면 좋겠다. 우리의 영혼은 뜨거운 가슴에서 차가운 머리를 거쳐 온기를 품은 향으로 세상을 채운다. 부디 그윽하고 달콤한 향으로 가득해지길 바란다.

오늘도 나는 살아있음으로 분노하고 싸우며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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