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리 셋은 늦은 산책을 나갔다가, 밤늦게 집에 올 딸을 위해 아이스크림을 사 왔다.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딸이 첫 숟가락을 떠야 한다는 엄마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아이스크림은 냉장고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12시가 좀 넘어 딸이 돌아왔다. 너무 늦어 나 혼자 맞이했다. 나는 되도록 딸의 얼굴을 보고 나서 잔다. 집에 왔을 때 아무도 맞이해 주지 않는 그 기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딸은 집에 오면 꼭 아빠와 미주알고주알 한다. 하루 동안 쌓아두었을 스트레스 보따리를 아빠한테 푸는 것이다.
나는 그저 듣기만 하고 열심히 추임새만 넣는다. "정말?", "헐 대박이네!", "걔 아주 안 되겠구나, 다신 놀지 마라" 등등. 100% 편파 대화다. 이야기의 전후좌우 전혀 안 따진다. 적어도 이 순간만은 난 무조건 우리 딸 편이다.
실컷 얘기하느라 아까부터 식탁 위에 있던 분홍색 포장을 잊고 있었다.
"아빠 근데 이건 뭐야?"
"어 그거? 엄마가 너 준다고 선물 샀지, 뜯어봐"
딸아이를 놀려주려고 뻥을 좀 쳤다.
"앗 뭐야? 이거 일회용 스푼이잖아!"
아빠가 그렇지 뭐, 하며 기대도 안 했다는 듯 표정을 짓더니, 이내
"뭐야? 아이스크림 샀어?"
의외의 환한 미소를 띠며 되묻는다.
"그래, 너 더위에 고생한다고 엄마가 아이스크림 샀어"
딸이 포장 속에 있던 일회용 아이스크림 스푼을 꺼내보더니 한참을 쳐다본다. 그러더니, 말하기를..
"오호! TV나 영화 보면 자동차 키를 선물로 받는 거 가끔 나오잖아?, 그거 아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근래 내가 본 딸아이의 표정 중에서 가장 밝고 환한 얼굴이었다. 생각해보니 자동차를 선물할 때 키 먼저 주고 나중에 차를 보여줬던 것 같다. 그렇다면 아이스크림도 스푼 먼저?
딸이 첫 숟가락을 떠야 한다는 엄마의 마음이 전해진 걸까? 딸아이는 아이스크림 스푼에서 의외의 행복을 느꼈나 보다. 영화 속 배우가 선물 받은 키를 들고 멋진 자동차로 향하듯이, 딸은 스푼을 들고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찾아 냉장고 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우리 딸은 그렇게 고3의 고된 하루를 내려놓고 있었다.
대학생이 된 딸은 진짜 자동차 키를 받을 수도 있다며 운전면허증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