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게까지 방과 후 실기 수업을 한 딸아이를 차로 데려왔다. 집에 오자마자 배가 고프다며 주방을 배회하길래 점심때 먹고 남은 피자가 있다고 알려줬다. 피자 박스를 발견한 딸이 반갑게 다가가더니 갑자기 놀라는 표정으로 얘기한다.
"뭐? 소주만 있으면 간다고? 와 정말 웃긴다! 아빠 이거 봐 피자 박스 표지에 이상한 말이 있어!~"
딸의 놀란 모습을 그렸는데, 실물과 많이 다르다.
무슨 말인가 하고 가서 보니 '주소만 있으면 갑니다!'를 '소주만 있으면 갑니다!'로 착각한 것이었다.
피자 박스 표지, '주소만 있으면 갑니다!' 라고 씌어있다.
"얘는 소주가 아니라 주소잖니? 네가 아무래도 소주가 당기나 보구나. ㅎㅎ"
딸아이의 모습을 보고 최근 읽었던 책에 있는 내용이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라는 책인데, 심리학 용어인 '무주의 맹시 (Inattentional blindness)'를 포함한 인지적 착각을 다루고 있다. '무주의 맹시 (Inattentional blindness)'란 시신경 손상에 의한 맹시와는 다른 것으로, 특정 사물이나 모습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사물이 나타나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딸은 그림 연습을 위해 다양한 물체를 놓고 정물 소묘를 한다. 그중에는 소주병도 포함된다. 몇 시간씩 한 물체를 바라보며 똑같이 그려야 하니 얼마나 그 물체에 익숙할까? 딸아이는 그렇게 소주병에 무의식적으로 주의를 집중하던 차에 '주소'라는 단어를 본 것이다. 그리고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오히려 평소 집중하고 있던 '소주'로 인지한 것이다.
1999년, 하버드대학 심리학과 조교수였던 대니얼 사이먼스와 대학원생이던 크리스토퍼 차브리스가 `보이지 않는 고릴라`라는 심리학 실험을 진행했다. 그들은 검은 상의와 흰 상의를 입은 학생들이 농구하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은 뒤 실험 참가자들에게 보여줬다. 그리고 "흰 티셔츠를 입은 학생들의 패스 횟수를 셀 것"을 요구했다.
가운데 고릴라가 있다.
그러나 막상 동영상이 끝난 뒤 그들이 실험 참가자들에게 물어본 것은 "고릴라를 보았느냐"라는 질문이었다. 동영상 중간에 고릴라 의상을 입은 여학생이 약 9초에 걸쳐 화면 중앙으로 걸어온 뒤 카메라를 향해 가슴을 치고 걸어 나간다. 그러나 놀랍게도 실험 대상자 중 50%가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패스 횟수에 집중하다 보니 고릴라를 미처 보지 못한 것이다. '무주의 맹시 (Inattentional blindness)'인 것이다.
이 책은 우리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6개의 착각을 다룬다. 주의력 착각, 기억력 착각, 자신감 착각, 지식 착각, 원인 착각, 잠재력 착각이 그것이다. 책은 일상의 착각이 인간의 사고와 판단과 행동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줌으로써 그 착각들이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또한 사람들이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일상의 착각을 이해하고, 그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실수와 사고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돕는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도 무주의 맹시에 의한 인지의 착각으로 볼 수 있겠다. 놀라지 말아야 할 것에 놀라고 있으니 말이다.
이 이야기는 탈 맥락화와도 깊이 연관되어 보인다. 우리는 평소 집중하던 사물이나 생각에, 세상 모든 것들을 투영시킨다. 그리고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인지한다. 모두 인지적 착각이다. 때와 장소에 따른 철저한 탈맥락화가 필요해 보인다. 자라 보고 놀랐더라도 솥뚜껑은 편안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딸아이는 내 말에 씩 웃더니 피자를 맛있게 먹었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빠 이제 소주병은 그만 그려야겠어!"
미대생이 된 딸아이는 정말 소주병을 더 이상 그리지 않는다.
디자인 전공이라 정물 소묘는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 아빠와 소주도 한 잔 하곤 한다. 그 때를 추억하며.
이글은 다음 포탈 메인에 올라 조회수 6만을 기록했다. 딸내미 덕분에 다음 포탈에도 노출되고 간식 차려준 보람이 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