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에 써둔 글.
길었던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연일 기승이다. 입추도 지났건만 절기가 무색하게 덥다. 그러나 해도 차면 기운다고 곧 있으면 시원한 바람도 불고 밤도 길어지겠지. 그러고 보니 며칠 후면 아버지 기일이다. 아버지가 떠나시던 14년 전 그때도 그렇게 더웠다. 아버지는 무더위를 잘 넘기시고는 정작 가을 문턱을 넘지 못하셨다. 봄에 청천벽력 같은 말기 암 선고를 받으시고는 석 달을 못 넘긴다는 의사의 말과 달리 그래도 6개월이나 사셨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해마다 이맘때면 아버지의 빈자리가 새롭게 느껴진다. 너무 갑자기 떠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불같은 성격의 할아버지와 가냘프고 천상 여자 여자 하는 성품의 할머니 사이에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나셨다. 일제 강점기에 중학교를 다니셨고 대학 신입생 때 한국 전쟁을 겪으셨다. 많은 우리의 아버지들이 그러하셨듯이 아버지도 격동의 시대와 그렇게 함께 하셨다. 아버지는 가끔 그때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중학교 때, 일본 순사에게 군사 훈련받은 이야기가 충격이었다. 돈을 운동장에 흘리면 그것을 잽싸게 줍고는 그 학생은 훈련에서 열외 시켜 주었다는..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셨다. 우리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 집에 불이 나 조실부모 하시고는 혈혈단신으로 전국을 누비며 장사를 하셨다. 할머니께 들은 얘기로, 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만주까지 가서 장사를 하셨다고 한다. 그 먼 거리를 오가며 보따리 장사를 하신 것이다. 덕분에 적지 않은 돈도 버시고 집안을 일으켜 세우셨다. 그만큼 강인한 심신의 소유자 셨고,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분이셨다. 아버지는 그런 강인한 할아버지보다는 조용하고 글 읽기를 좋아하시던 할머니를 더 많이 닮으셨다. 그러니 너무 강한 할아버지 밑에서 아버지는 적지 않은 부담을 받으셨으리라. 할아버지는 당신께서 장사하시면서 일제 강점기 때 법률 공무원들과 교류를 많이 하셨는데, 보상 심리 때문인지 아버지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다. 우리 집은 할아버지의 말씀이 곧 법이요 진리였다. 법학을 전공한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사법고시에 응시하셨다. 당시엔 해마다 몇 명 안 되는 인원만 뽑던 시절이었다. 거기에다 고시에 별 뜻이 없었던 아버지는 그렇게 몇 번 낙방하시고는 일반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셨다.
당신의 뜻대로 되지 못한 아버지를 할아버지는 내심 못마땅해 하셨다. 웃픈 얘기지만 내가 어렸을 때 나한테도 할아버지는 사법고시를 보라고 하셨다. 고교 2학년 때 이과로 진로를 정한 이후에도 그 말씀은 계속되었다. "이과생은 사법고시 보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냐?" 틀린 말씀은 아니라서 뭐라고 대꾸도 못하고 그냥 생각해 보겠다고만 말씀을 드렸었다. 할아버지의 위엄은 정말 대단했다. 잿더미에서 홀로 자수성가하셨고, 자식을 누구보다 사랑하셨으며 천하를 호령하는 카리스마의 소유자 셨다.
아버지는 당신의 다소 유유자적하는 선비 스타일의 성격과 엄청 센 자존심 때문에 쉽게 조직 생활, 그것도 경직된 공무원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셨다. 결국 오래지 않아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시고 당시 양묘업을 크게 하시던 할아버지를 도와 가업을 이어받을 준비를 시작하셨다. 이후 할아버지는 사업 영역을 확장하시다가 큰 실패를 하셨고 별로 좋지 않은 말년을 보내셨다. 당신에게 큰 산이자 너무 큰 부담을 안겨주셨던 할아버지셨지만, 아버지는 끝까지 지극정성으로 할아버지를 지켜드렸다.
내가 지켜본 우리 아버지는 학교 선생님이 제일 잘 어울리는 분이었다. 점잖으시고 매너 있으시며 상대방을 존중하셨다. 책과 신문을 가까이하셨고 해박한 지식과 상식의 소유자 셨다. 나는 어렸을 때 모르는 건 무조건 아버지께 여쭤봤다. 모르시는 게 없을 정도였다. 그런 아버지가 지극한 효심이었는지, 할아버지의 과도한 자식 사랑을 마다하지 못한 채 당신 자신의 주도적인 삶을 사시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버지는 항상 나에게 무언가를 강요하시거나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그저 말없이 등을 두드려 주셨고 뭐 필요한 게 있냐고 물으시는 게 다였다. 대학 입시에 실패했을 때도 나의 등을 두드려주시면서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 대학 이름보다는 네가 하고 싶은 전공을 찾아가거라."라고 말씀해 주셨다. 14년 전 아버지와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나는 늦깎이 대학원생이었다. 주말마다 올라와 아버지와 시간을 보냈다. 그날은 이상하게 아버지와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아버지! 옛날에 나 대학 떨어졌을 때 왜 나한테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꼭 나한테 무관심하신 것 같아서 서운했단 말이에요." 아버지의 대답이 참 와 닿았다. "그거야 너 부담 갖지 말라고 그랬지. 자식이 좋은 대학 가는 걸 싫어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니?" 늘 그렇듯 내 등을 두드리시면서 "학위 잘 마치고 하고 싶은 일 찾아서 즐겁게 생활하거라."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이었다.
나는 아버지 말씀대로 내가 하고 싶은 전공을 찾아서 대학을 갔고 또 박사학위를 마친 후에도 하고 싶었던 일을 원 없이 했다. 이젠 느낄 수도 들을 수도 없지만, 나는 이 가을 문턱에서 꼭 한번 아버지의 둥 두드려주시는 손길과 격려와 믿음의 목소리를 느끼고 싶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다시 한번 용기 내어 나의 인생 2 막을 열어갈 수 있을 듯하다. 오늘 밤엔 아버지의 만남을 꿈꾸며 잠자리에 들고 싶다.
유난히 아버지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여름의 끝자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