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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드퓨처 Dec 31. 2021

둘째 누님의 회갑 파티와 추억 소환


둘째 누님이 어느덧 회갑맞이했다. 신축생인 누님이 다시 돌아온 신축년에 맞이한 61번째 생일이다. 옛날 평균 수명이 길지 않을 때야 회갑 잔치를 성대하게 했지만 요즘은 여느 생일과 크게 다르지 않게 생각하는 분위기다. 우리 5남매는 조촐하게 식사라도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코로나로 외식도 힘든 터라 어머니를 모시고 누님 집에 모였다. 시켜먹자고 해도 한사코 손수 차리겠다는 누님 고집을 아무도 꺾지 못했다. 덕분에 솜씨 좋은 누님의 요리를 원 없이 맛볼 수 있었다.


둘째 누님은 손이 귀한 가부장적인 집에 둘째 딸로 태어났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적지 않은 사랑을 받았다. 어머니는 또 딸을 낳았다고 눈치를 보셨지만, 둘째 누님은 하는 짓이 이쁘고 항상 방긋 웃는 덕에 우리 집의 마스코트였다. 큰 누님은 살림 밑천이란 이유로, 셋째 누님은 남동생을 봤다고 해서, 그리고 막내인 여동생은 늦둥이란 이유로 이쁨을 받았으니, 둘째 누님은 오로지 스스로 살길을 찾은 이었다.


나는 아홉 살이나 많은 누님과 군것질을 공통분모로 가깝게 지냈다. 취학도 하기 전에 쫀드기와 뽁기 그리고 아이스케끼까지 누님 덕불량식품을 마스터한 나는 급기야 초등학생 때부터는 함께 떡뽂이 맛집 탐방을 다니기 시작했다. 북아현동에 살았던 우리는 굴레방다리 아현 시장을 거쳐 이대, 그리고 신촌까지 원정을 다녔다. 누님이, 언니와 바로 밑 동생을 두고 굳이 어린 나를 데리고 다녔던 이유가 뭘까?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도 하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어머니는 먹거리에 신경을 많이 쓰셨다. 시골에서 보내주신 식재료를 위주로 간식까지 직접 만들어주셨다. 우리들은 모두 맛있게 먹었지만 둘째 누님은 아니었다. 달리 간식을 좋아했던 둘째 누님이 몇 번 사 먹다가 어머니한테 혼쭐이 난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 나와 같이 다녔고 어머니한테 들키면 내 핑계를 대곤 했다. 삼대독자 외아들의 말엔 약한 모습을 보이시던 어머니께 누님은 맞춤식 전략을 짠 것이다. 나는 누님 덕분에 간식 신세계에 눈을 떴고 누님은 내 덕분에 어머니의 야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린 아홉 살 터울을 띄어 넘는 끈끈한 공생 남매가 되었다.


둘째 누님은 부모님에게 아픈 손가락이었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 그러니까 누님이 결혼 적령기 무렵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마당 넓은 2층 집은 경매에 넘어갔고  우리는 졸지에 길바닥에 나앉아야 했다. 입 하나라도 줄여야 할 처지가 되자 누님은 아르바이트 갔다가 만난 매형과 도망치듯 결혼을 했다. 행복하게만 보이던 누님의 결혼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직 어린 남매를 두고 매형이 불의의 사고를 당했고, 그렇게 누님은 갓 마흔을 넘은 나이에 혼자되고 말았다. 


늘 둘째 딸을 애틋하게 생각하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누님도 가장 많이 슬퍼했다. 다행히도 시간은 많은 것을 해결해 주었다. 모진 세월을 견뎌낸 누님은 남매를 훌륭한 사회인으로 길러냈고 그렇게 손수 차린 회갑 잔치상 앞에 우리를 초대했다. 다시 돌아온 신축년이 누님에겐 인생 2막을 알리는 신호등이었으면 좋겠다. 맛있는 떡볶이를 찾아 어린 남동생을 데리고 다니던 그때처럼 이젠 웃음 가득한 일들만 누님과 조카들 앞에 늘 함께하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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