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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석 May 05. 2021

고통이 우리를 부를 때

전직 기자미국 병원 채플린 생존기

1부.     병원 채플린이 뭐예요?  

1.   채플린은 죽음의 전령? 병원 설교자? 영적 의사?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인식의 틀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에 의해 마련된 일종의 작은 방들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는 뜻이죠. 그래서, 어떤 단어를 듣거나 개념을 들을 때 그것에 적합한 방문을 열고 그 속에서 새로운 것들을 이해하는 방식이죠. 그렇다 보니 자기 방에 적합하지 않은 내용이나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때는 어떤 방문을 열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집니다. 혹은 자신이 기존에 알고 있던 경험과 지식에 비추어 새로운 것들을 지레짐작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들을 선입견이라고 하죠.  병원 채플린과 관련해서도 이런 일이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납니다. 저마다의 방에서 저마다의 지식 와 경험을 통해 습득한 사실들로 가득 찬 선입견의 방을 통해 병원 채플린을 이해합니다. 

    대표적인 사례 몇 가지를 들어 보겠습니다. 지난 2016년 오하이오 주립대학병원 제임스 암병원에서 일할 때 일입니다. 암병동을 돌며 환자들을 만나는 중이었습니다. 한 병실 앞에서 간호사에게 환자가 채플린 방문을 원하는지 물어봐 달라고 말하고 문밖에서 기다렸습니다. 잠시 뒤 문틈 사이로 화들짝 놀란 환자의 말이 새어 나옵니다. “왜요, 왜 채플린이 저를 방문해요? 나 내일 죽어요?”  나중에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뜻밖의 채플린 방문에 대해 조금 놀란 기분을 나름의 유머로 승화시켰다고 했습니다. 암병동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하면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병원 채플린들이 종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은 채플린의 방문이 곧 죽음이 임박했다는 선입견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또 환자와 가족이 가지고 있는 병원 채플린에 대한 선입견이 있습니다. 대부분 기독교를 배경으로 하는 환자와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인 것 같은데요. 특히, 청소년이 가지고 있는 병원 채플린에 대한 선입견이 바로 지역 교회 목사들처럼 설교를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제가 청소년 시절 좋아했던 미국 팝 가수 중에 마돈나가 있습니다. 사회 비판적이고 다분히 반항적인 노래들을 많이 불렀는데요, 그중에 “아빠 설교하지 마세요, Papa don’t preach”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만큼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은 청소년들을 이해하려는 노력보다 세상의 기준에 맞도록 도덕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이들에게 저를 채플린, 병원 목사라고 소개한 뒤 반드시 덧붙이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설교를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이죠. 그러면, 아이들은 물론이고 환자 부모들까지 빵 터집니다. 저는 이 웃음 속에 여러 가지 감춰진 사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오해는 하지 마세요. 설교는 반드시 필요하고 교회에서든지 집에서든지 바른생활에 관한 이야기는 꼭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때와 장소에 따라 그 설교의 방식과 내용은 세밀하게 조정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환자를 방문할 때는 그 설교의 중심과 전달 방식이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환자가 고통 속에서 씨름하고 있을 때는 어떤 설교적 명언도 환자를 위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다시 제가 암병원에 경험한 이야기를 해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1년 정도 함께 보살 폈던 한인 환자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젊어서 미국에 이민을 와서 한인교회에서 많이 섬기셨던 분이에요. 처음으로 만난 한인 환자여서 저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분과 대화를 하는 동안 참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환자분이 함께 했던 교회의 직분자가 방문을 오셔서 위로 끝에 성경 말씀을 예로 들면서 환자 분의 지난 일을 돌아보시고 회개하실 부분이 있다면 그렇게 하셔야 모든 것이 잘 풀릴 거라는 취지로 이야기를 전하셨다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친분 관계나 또 영적인 상황들을 고려해서 정말 해 드려야 할 말씀이 있다면 저는 전해드려야 한다는 쪽입니다. 그러나, 그때와 내용은 이야기를 듣게 될 사람의 상황, 즉 시간과 영적 상태 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타이밍입니다. 제가 그 말씀을 전해 듣고 아파하는 환자를 바라보면서 참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아무리 순전하고 100 % 옳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그 말씀을 들을 사람의 상황과 영적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설교적 조언’은 때때로 ‘비현실적인 조언’을 넘어 많은 경우 환자의 마음과 영혼을 상하게 하는 흉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한국에서도 번역된 토마스 G. 롱 목사의 책 “고통과 씨름하다,  What shall we say?”에서도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할 타이밍을 고려하는 ‘목회적 지혜’를 언급합니다. 


“사람들이 고통에 빠져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며 오열하고 괴로워할 때는 이 고통의 문제를 신학적이거나 이론적으로 생각하는 때가 아니라, 바로 그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때이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를 향해 마음의 문을 열 수 있게 된다.” (p.45 저자 직역).


그러니, 그 몸부림의 시간, 고통과 씨름하는 시간만큼은 어떤 성경의 말씀이나 명언도 현실적으로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 사람들은 특히 목회자나 교회 직분자들이 이런 실수를 범할까요? 다양한 이야기가 있겠지만, 저는 바로 조급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위로를 하고 눈에 보이는 반응을 이끌어 내야 한다는 조급함 말입니다. 그리고, 이 조급함의 바탕에는 불안, anxieity이 깔려 있습니다. 이 염려와 두려움에 대해서는 2부에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경험한 병원 채플린에 관한 선입견은 좀 근사한 내용입니다. 저도 가끔 이런 말을 하는데요. 사례를 들어 보시죠. 병원에서는 주로 자신을 알리는 배지를 가슴에 달고 다닙니다. 그 배지에는 이름과 소속 전문 분야 등이 기록돼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 배지에는 영어로 ‘JAE PARK’이라는 영문 이름 아래 조금 작은 글씨로 ‘스탭 채플린, Staff Chaplain’이라고 돼 있습니다. 사실 한 두 걸음 뒤에서 보면 이 직군 표시가 잘 안 보입니다. 그리고, 간호사나 다른 스탭과 달리 정장 차림으로 다니기 때문에 흰가운을 입지 않은 의사들과 구별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환자나 가족, 다른 스태프들이 의사냐고 물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근사하게 말하죠, “몸을 다루는 의사는 아지만, 영혼을 다루는 의사입니다”라고요. 그러면, 많은 환자나 가족들이 “그것 참 근사하고 말이 되는군요”라고 이야기합니다. 잠시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병원 채플린은 ‘영혼의 의사’가 아닙니다. 혹시,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해 오셨던 분들이라면 계속 그렇게 여기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수련기간을 통해 ‘아, 나는 영혼을 고치거나 영혼을 구원하거나 혹은 구원에 이르도록 도움을 주는 의사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특히, 의사 선생님들이 의학적 지식으로 환자의 병을 고치는 것과 같은 일은 병원 채플린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부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이야기 나누겠지만, 병원 채플린은 환자나 환자 가족, 스태프들이 고통과 씨름할 때 그들과 함께 고통 속에 함께 있는 사람이지 그 고통을 직접 치유하거나, 없애거나, 피하게 하거나, 좋은 방향으로 유도, 조작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병원 채플린의 존재 이유는 환자나 가족이 고통과 씨름할 때 그 고통을 없애주고 치유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의 여정 가운데 함께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제가 경험한 병원 채플린에 관한 선입견 세 가지입니다. 채플린은 죽음의 전령이 아닙니다. 그저 위기의 순간에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채플린은 병원 설교자가 아닙니다. 환자나 환자 가족 스탭이 위기와 고통을 통해 스스로 그 고통의 의미를 찾아가는 동안 곁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병원 채플린은 ‘영적 의사’가 아닙니다. 고통을 치유하고, 환자의 문제를 고치는 일은 의사가 하지만, 그 과정에서 환자를 심리적으로 영적으로 고치거나 치유시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병원 채플린은 단지 그 고통의 순간에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면, 고통과 씨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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