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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석 Apr 30. 2021

애도 101

소중한 사람과 함께 울기

저는 미국 시골 대학병원에서 채플린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병원에서 일하다 보니 여러 가지 위기의 상황을 봅니다. 특히, 환자와 가족들은 아이들이 갑자기 죽거나,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조차 더 이상 치료를 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절망합니다. 많은 경우 곁에서 이들을 돕는 의사나 간호사들도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힘들어합니다. 지난주 한 간호사가 저에게 묻습니다. "환자가 갑자기 울며 이제 다 죽게 되었다고 할 때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며, "간단한 대처 방안을 알려 달라"라고 했습니다.


사실 각 사람마다 상황이 다르고,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소식에 반응하는 방식도 모두 다르기 때문에 뭐라고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제가 알고 대처하는 방법 몇 가지 소개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갑작스럽게 충격적인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어야 할 때나 병원을 심방할 때 어떻게 공감하는 말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을 지에 대해 제 경험과 배움을 바탕으로 조금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다만, 먼저 밝혀둘 것은, 저는 개인적으로 작은 슬픔(실연, 실직, 배신)은 겪어 봤지만, 큰 슬픔 (자식, 부모, 형제를 갑자기 잃는 일) 은 모두 타인의 슬픔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제가 나누는 말씀은 다분히 이론적이고, 제 병원에서 겪은 경험과 일천한 지식에 제한돼 있다는 점을 우선 밝힙니다. 


1. 함께 곁을 지켜주기 (being rather than doing)


제게 질문한 간호사는 자신이 그 슬픔에 빠진 환자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것(sense of helplessness)에 대해 가슴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뭔가 우리가 고쳐주고, 치료해주는 등 실질적으로 도와주어야 도와준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 간호사도 제게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 대답은 이랬습니다.  "간호사님, 뭘 해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그 곁을 지켜 주셨잖아요?"


많은 경우에 우리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처럼 무엇을 해야만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재난을 당한 사람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잘 곳을 제공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큰 슬픔으로 자신도 잘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슬픔을 잘 표현할 수 있도록 안전한 환경을 마련해 주는 일입니다.


누구도 화산처럼 폭발하는 슬픔을 단숨에 잠재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4살짜리 아이가 자신의 집 수영장에 빠져 죽었는데 숨진 아이를 보며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아기의 부모나 할머니에게 말로서 어떤 위로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그들이 충분히 슬퍼할 수 있도록 안전한 공간과 시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조금 슬픔이 누그러들면 물과 휴지가 필요합니다. 어떤 말보다 이 순간에는 휴지와 물이 제일 필요합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타인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애도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과 함께 말이죠.


의료진에게는 더 어려운 순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특히, 환자가 사망했을 때 그 사실을 확인하고 환자가족에게 직접 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레지던트 의사들이 하는 실수 가운데 하나가 앞뒤 없이 사망을 선고해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환자 가족이 가장 듣고 싶은 이야기가 환자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여부이지만, 이런 폭탄선언을 할 때도 순서가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4살짜리 아이의 사망 사고를 비춰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그 당시 아이의 부모는 응급실 옆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의사와 사회복지사, 그리고 저가 함께 들어갔습니다. 먼저, 의사가 환자가족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함께 방문한 팀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자신의 자리를 정합니다. 때로 환자 가족들 앞에서 무릎을 땅에 대로 자신을 낮추는 의사를 본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환자들이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먼저 말하게 합니다. 지금까지 환자 가족들이 알고 있는 상황을 먼저 듣습니다. 이럴 경우, 환자 가족들이 말을 하는 과정에서 다음 큰 소식을 받아들일 심리적인 여유를 갖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환자 가족들의 말을 모두 경청한 다음, 지금까지 상황을 차분하게 설명합니다.

 "부모님이 응급실을 나가신 뒤, 30분 정도 가슴압박을 실시했지만, 심장 박동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게 돼서 너무 죄송합니다. 사망시각은 3시 30분입니다."


순간 아이의 엄마와 할머니가 오열했고 저희들은 방을 나왔습니다. 이후에, 숨을 거둔 아이들 직접 보고 또 한 번 애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가 한 일은 그 곁을 지키며 필요한 휴지를 드린 일뿐입니다. 기도하기를 원하는지 물었지만 원하지 않았습니다.


병원 채플린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말이 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지 마라. 환자나 그 가족들은 위기에 순간에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누가 거기에 있었는지는 기억한다"라고 말입니다. 


심리학자이자 애도 (Grief of Loss)에 관해 수십 년 연구해온 알렌 워펠 박사는 그의 책, "사별한 사람들과 함께 하기 Companioning the Bereaved"에서 '함께하는 것 Companioning'은 "돌봄을 받는 대상을 앞서서 이끌어 가는 것도 아니고, 그 대상에게 이끌려 가는 것도 아닙니다. 상대를 고치려고 하지 않고 함께 곁에서 걸어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돌봄 대상 곁에서 그가 가면 가고, 그가 서면 서는 어찌 보면 수동적으로 보이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가장 적극적인 돌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2.  슬픔을 충분히 느끼게 하기 (validating rather than minimizing)


슬픔이 폭발한 순간에 많은 의료진들이 하는 실수 중에 하나가 마치 불을 끄려는 소방관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실 큰 불 앞에서는 소방관들도 섶 불리 달려들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환자나 가족들이 슬퍼할 때 곁에 있던 사람들이 '괜찮아질 거다' '희망이 어디엔가 있을 거다' 라며 쉽게 위로의 말을 던지며 울음을 자제시키려고 합니다. 


물론, 병원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것을 막기 위해 자제를 유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섣부른 행동은 환자나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환자나 가족들은 슬퍼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적당한 장소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입니다. 또한, 이런 슬픔과 애도의 과정이 있어야 이후에 건강하게 회복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상대방의 슬픔이나 다른 감정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조금 특별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칼 로저스는 이것을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 Unconditional Positive Regard, UPR"이라고 불렀습니다. 돌봄의 대상을 나보다 낮거나 못한 존재가 아닌 같은 감정과 이성을 가진 같은 인간으로 인정하고 돌봄 대상의 자기 결정과 판단을 존중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저는 이런 태도가 공감하는 마음을 표현하는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적으로 죽음이나 눈물은 상당히 금기시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사회적 문화적 배경은 미국 사회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죽음을 이야기하거나 눈물을 보이는 일이 많은 경우 믿음이 없거나 용기가 없는 사람으로 비치는 게 됩니다. 이런 정죄나 판단에 익숙한 돌봄의 대상에게 아무것도 정죄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겠다고 작정하며 함께 곁을 지키겠다는 마음을 전하는 기술이 바로 상대의 말을 전인격적으로 수용해 주는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 UPR'입니다. 


제가 오하이오 주리대 병원에서 채플린 레지던트 수업을 받고 있을 때 한  60대 백인 장로교인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자꾸 창밖을 보면서 자기의 아들이 오고 있다고 말을 했습니다. 한 참 이야기를 듣고 보니 계속 이야기가 빙글빙글 돌고 말을 서두가 없게 들였습니다. 알고 보니 치매를 앓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대화를 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저는 논리적으로 생각하며 그분을 판단하고 다음 질문을 생각했을 뿐 그분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뭔가 그분의 언짢은 감정을 전하려고 했는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환자나 돌봄의 대상이 하는 말의 진의가 문제가 되지 않을 때가 있구나!' 무슨 말이냐면, 그분이 비록 말을 논리적으로 하지 못하고, 고장 난 CD처럼 했던 말을 계속 반복 재생했지만, 제가 그분의 감정에 집중했다면, 그분이 아들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의 감정을 나에게 전하려고 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됐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화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의미 없이 들리는 말을 통해서도 상대방의 감정을 느끼고 경청하는 것은 그의 슬픔을 존중하는 것이며 큰 슬픔에 빠져 있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작은 버팀목이 됩니다. 


나중에 간호사에게 들은 이야깁니다. 그분의 아들은 그녀가 젊은 시절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합니다. 치매가 왔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 아들을 그리워하며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넌 아들을 병원 창문 밖 도로에서 매일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에겐가 그녀의 마음을 알리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은 그 슬픔을 통해 반드시 새로운 길을 찾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섣불리 그 슬픔을 걷어내고 구해주려고 하다 보면 오히려 더 큰 기회를 빼앗는 경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비록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일 지라도 애도자의 감정에 집중하며 그 슬픈 감정과 생각을 충분히 느끼게 하는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말과 표정, 행간의 의미까지 놓치지 않고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3. 새로운 길 찾기 (seeking a new way of life rather than going back to normal)


병원에서 만나는 환자들 대부분이 완쾌되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길 원합니다. 하지만, 사실 완쾌되는 분들도 그렇지만, 가족을 병으로 잃는 분들은 더욱더 이전으로 되돌아 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녀, 부모님 혹은 친구가 더 이상 자신과 함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슬픔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기억에서 조금 희미해질 수는 있지만, 의식이 있는 한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새로운 삶의 의미, 방향, 길을 찾는 일이 애도 과정의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합니다.


인간은 슬픔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슬픔을 통해 더욱 이성적인 판단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고 합니다. 심리학자 조지 보낸 노는 그의 책, " The Other Side of Sadness (2007)"에서 슬픔이라는 감정의 역할을 연구한 실증연구들을 소개합니다. 


슬픔을 깊이 경험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그룹보다 인지적인 능력, 특히 기억의 정확도 있어서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슬픔을 통해 우리 뇌는 더욱더 현실을 이성적으로 보고 판단하게 된다는 슬픔의 긍정적인 면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애도 과정에서 슬픈 감정은 소중한 사람을 잃은 상황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이야기합니다(p.31).


하지만, 많은 환자들 가운데 유독 기독교 신자들이 슬픔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거나, 연명치료 중단을 결정하지 못하고 시기를 놓쳐 가족들과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지 못한 채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이 기적을 믿기 때문에 의료진의 다소 애매한 판단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실, 의료진들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항상 50대 50의 자리를 지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초기 암 환자의 경우 화학적 치료나 방사선 치료, 물리적 수술을 통해 회생 가능한 경우를 제외하고, 병원에서 완치는 어렵지만, 처치는 가능하다는 말 (not curable, but treatable)을 의사들이 많이 합니다. 정말 50 대 50일 가능성도 있지만, 많은 경우 이런 진단을 받으면 3개월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기독교인들은 희망적으로 해석합니다. 이어 믿음과 주변의 격려를 통해 고된 화학치료를 받으며 기적을 바라며 연명치료 아닌 연명치료를 받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은 줄어들고 지치고 힘든 날들을 좋아지는 날을 반복하다 결국 죽음에 이르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족들과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분들은 나름의 의미를 찾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병마와 싸우고 싸우다가 지쳐서 갑자기 돌아가시는 분들은 그 어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인생의 의미를 생각할 여유도 없이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는 참담한 현실을 종종 봅니다. 살아 있을 때, 의식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 삶에 대해, 가족에 대해, 인생에 대해 정리하는 시간을 꼭 가지는 것이 떠나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남아서 그 슬픔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삶의 길을 찾게 하는 소중한 자산이 됩니다. 


최근 한국에서 연명치료를 미리 거부하는 서약서 (Advanced Directive)가 이미 시행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2018년 2월 시행). 스스로 죽음을 차분하게 준비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특히, 가족들에게만 이런 결정의 부담을 주지 않고 병원에서도 돌봄 차원의 정보 제공과 컨설팅이 실질적으로 제공되길 기대합니다. 


덧) 이런 모든 과정을 겪을 겨를 조차 없이 사고나 사건, 자연재해, 전쟁 등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분들은 극심하고, 다중적인 애도(Complicated grief)의 과정을 넘어, 우울증이나 심각한 정신적 질환을 겪는 분들도 있습니다. 반드시 전문 의료진이나 상담사로부터 도움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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