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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석 May 06. 2021

고통이 우리를 부를 때

전직 기자 미국 병원 채플린 생존기

2.  팀플레이


그러면, 많은 분들이 이런 의문이 들것입니다. 그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아닌가요? 그러고도 병원에서 돈을 주나요? 네, 돈을 줍니다. 왜냐고요?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현실적인 이유인데요. 바로 병원 채플린이 단순히 종교적인 역할만을 맡는 것이 아니라, 다분야협력팀 interdisciplinary team에서 함께 참여하는 팀원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적인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이제 의사만의 일이 아닙니다. 미국 병원에서는 의사가 병을 진단하고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진단 방사선 전문가과 약사, 심지어 영양사, 사회복지사, 재활치료사, 호흡기 치료사 등 수많은 전문 분야의 인력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 팀 가운데 병원 채플린도 들어 있니다. 많은 병원에서 통합적 환자 돌봄, Total Care or Wholistic Care을 표방하고 있는데요, 바로 육체와 정신과 영적인 돌봄을 통해 전인적으로 환자를 돌본다는 체계입니다. 이런 이유로 미국 많은 대형 병원에서는 소정의 전문적인 임상목회훈련 Clinical Pastoral Education, CPE을 마친 목사나 그에 상응하는 종교적, 영적, 임상적 훈련을 받은 사람들을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병원 채플린은 이 다분 야간 협력팀에서 적극적으로 역할을 찾아야 하는 전문인입니다. 모든 팀 활동이 그렇지만,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팀 활동에 기여할 공간이 줄어듭니다. 특히, 가족들과의 중요한 의사결정이나 가족 돌봄에 있어서 의사나 사회복지사의 입김이 크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팀에 기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종교적인 환자들에게 잠시 기도나 해주는 종교적인 일만 맡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결코 중요하지 않아서 이런 뉘앙스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 병원에서 채플린을 고용할 때에는 단순히 종교적인 일만 시키기 위해서 채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로 팀원으로서 종교가 다른 환자와 가족들을 돌보는 일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나아가서 같은 팀원이나 병동 안에 있는 다른 간호사 등 스태프들도 함께 돌보는 것이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스태프 돌봄에 관해서는 2부에서 좀 더 자세히 기술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병원 채플린이 어떻게 팀원으로서 ‘함께 하는가’에 관해 경험을 나눠보겠습니다. 특히, 앞서 말씀드린 병원 채플린의 이상적이고 이론적인 정의가 문자적인 의미가 아닌 실제적인 의미에서 어떻게 적용돼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다시 깨닫게 된 계기가 된 사건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병원 채플린이 주된 임무가 ‘고치는 일이 아니라 고통과 씨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그것이 실제 병원 현장에서 어떻게 수행되는가 하는 부문에 관한 사례입니다. 

    하나는 저의 잘못된 사례이고, 다른 하나는 제 동료 채플린의 좋은 사례입니다. 오하이오 주립대학병원에서 초기 채플린 레지던트로 있을 때 일입니다. 하루는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혼자 병실을 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간호사가 아주 짜증을 내면서 병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좋은 사례가 될 것 같아서 그 병실에 들어갔습니다. 50대 중환자가 누워있었는데 그 가족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간호사와 갈등이 있는 겁니다. 환자 가족의 주된 불만은 큰 수술 뒤 의식을 회복하고 있는 환자를 간호사가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몇 번씩 불러야 응답을 하고 표정도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는 환자가족 이야기를 듣고 마치 정의로운 기자처럼 민원을 해결해야 주어야겠다는 심정으로 담당 간호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런 일이 있다고 하는데 간호사로서 좀 신경을 써야 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안 되는 영어에도 최상급 존칭을 써가며 조심스럽게 의견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간호사가 갑자기 울면서 잘 모르면 가만히 있어야지, 같은 병원 명찰을 달고 왜 환자 편을 드느냐고 버럭 화를 내는 겁니다. 속으로 ‘아이코, 큰 일어났네’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뭐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병원 목사에게 이렇게 화를 내도 되냐’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몹시 상했습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니 안 되는 영어에 혀는 더 꼬이고 그래서 마지못해 “오케이! 아임 쏘리’라고 말하고는 중환자 병동을 나왔습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씩씩대고 있는 대고 있다가 저의 채플린 감독관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됐습니다. 그리고, 대화록을 작성해 다음 세미나 시간에 나누게 됐죠. 동료 채플린들의 따뜻하면서도, 직설적인 조언으로 어디서부터 내 돌봄이 잘못되었는지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내 힘으로 ‘구원자’가 되고자 했던 조급함이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시간 한 동료가 나눠준 이야기를 통해 병원 채플린이 ‘고통과 씨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한 수 배우게  되었습니다. 

    불교 신자 이기도 하며 평생을 간호사로 일해 온 50대 초반의 백인 여성 채플린이 나눠 준 이야깁니다. 그녀도 환자 가족과 간호사간의 갈등 상황을 대하고 환자와 간호사를 돌본 사례를 나눠주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핵심은 바로 누구의 고통도 즉각적으로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화가 난 환자 가족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고, 그 환자 가족이 스스로 그 갈등을 다시 생각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준 것입니다. 동시에, 간호사를 찾아가서도 환자 가족들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 암시를 주지 않고, 오로지 간호사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그녀의 감정에 집중해서 마음속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 간호사가 집에 아픈 남편이 있고, 동료 간호사가 결근을 해서 평소보다 많은 환자를 보고 있었던 것을 파악하고, 채플린이 자신의 고충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 줌으로써 그녀가 누구에겐가 관심을 받고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되찾게 해 준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을까요? 

    네, 맞습니다. 짐작하신 대로 그 간호사가 환자 가족을 찾아가 진심으로 사과함으로써 갈등이 훈훈하게 마무리됐습니다. 이렇게 병원 채플린은 단순히 꿔다 놓은 보리자루처럼 가만히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한쪽의 말에 고취되어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자청하며 나서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이죠. 병원 채플린의 함께하고 돌보는 방식은 이렇게 갈등 상황에서 어느 편도 들지 않고 그저 갈등이 야기한 고통과 씨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들어줌으로써 그 대상이 ‘아, 누군가는 나에게 이런 관심을 보이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구나’하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당사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힘과 시간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신기하지 않나요? 

    물론 이 한 경우를 가지고 병원 채플린의 돌봄을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문제의 상황이나  갈등의 상황을 중재하는 사람들은 한쪽의 이야기를 듣거나 특히, 피해자의 이야기만 듣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조급하게 행동하다 보면 오히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더 확대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는 거죠. 저처럼 말이죠. 어쨌든 병원 채플린은 다분야 협력 팀원으로서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면서 환자나 환자가족과 스태프의 고충을 적극적으로 들어주는 일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어쩌면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 제 결론입니다. 아직도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만, 이 정도면 월급 받을 만하지 않나요? 누구나 이런 일은 할 수 있지 않냐고요? 그러게요, 꼭 채플린이 아니어도 그럴 수 있겠네요.  그러면, 어떻게 병원에서 월급을 받을 만한 정체성, 역할론을 더 찾아야 할 것 같네요. 휴 ~  다음 장으로 넘어가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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