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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석 Jul 02. 2021

눈물을 잊은 그대에게

여덟 살 때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목수셨던 할아버지는 항상 일을 마치시면 함께 일하시던 분들과 저녁을 드시고, 얼큰하게 취해서 집으로 돌아오실 때가 많았습니다. 한 손에는 고등어,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작은 도넛 과자 한 봉지를 사 오시곤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당시 유행했던 개다리 춤을 추며 할아버지를 한 번 웃겨 드리면 여지없이 그 과자는 제 차지였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항상 장손은 어디서든지 당당하고 가족들 앞에서 절대로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할아버지의 품에 앉아 그 이야기를 들으며 왠지 모를 뜨거움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런 할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던 날, 전 병원에서 울지 않았습니다. 

    영정을 모시고 장지로 가는 행렬 맨 앞에 서서 당당하게 걸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나를 보고 계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관을 땅 속에 넣고 가족들이 한 삽씩 흙을 부은 다음 인부들이 무덤을 메우려고 할 때였습니다. 저는 땅 속 저만치에서 사라지는 할아버지의 관을 보며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참았던 눈물은 언제고 터져 나오게 마련입니다. 


2020년 6월, 주일 오후 내과병동에서 방문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루터교회에 다니는 환자가 성찬을 Holy Communion 받고 싶다고 했습니다. 평상시에는 루터교 채플린이 자원봉사를 하는데 코로나 19 때문에 외부 성직자들은 병원 방문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병실을 찾았습니다. 


70대 백인 할머니가 백발 머리를 가지런히 하고 소파에 앉아 있습니다. 제 소개를 하고 방문 이유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아주 부드러운 태도로 상황을 받아 드렸습니다. 그 모습이 참 단아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좀 나눌 수 있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할머니가 맞은편 침대에 앉으라고 흔쾌히 말씀하시더군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서 제가 직접 성찬을 베풀 준비는 안됐지만, 성찬의 핵심인 예수님의 말씀을 좀 나눠도 되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그 할머니는 호기심을 가지며 끝까지 제 말을 경청했습니다. 제가 나눈 말씀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짧은 말씀입니다. 채플린 레지던트 시절 강력하게 저를 인도했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1장 35절,  


"예수님이 우셨다, Jesus wept."   


배경이 되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올라가실 때마다 꼭 들렀던 베다니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이 도우시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나사로라는 사람과 여동생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나사로를 '우리의 친구'라고 부르시는 것을 보면 3년 공생애 동안 예수님과 그의 무리가 가장 많은 교류를 한 가정이 아니었을까 저는 추측합니다. 이 나사로가 병으로 죽어 나흘이 지나서야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여동생들은 늦게 오신 예수님을 붙들고 오열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려 내는 이야깁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나사로의 여동생들과 유대인들이 슬피 우는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이 우셨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이 우셨다는 말씀이 성경에 있다는 얘기를 듣자, 할머니는 조금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 이야기를 수십 번 읽었는데, 왜 저는 예수님이 우셨다는 말씀을 오늘 처음 듣는 것 같지요!" 


할머니가 의외의 반응을 보이자, 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더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자신이 얼마 지나지 않아 처절하게 십자가에서 죽게 될 것을 미리 보셨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분은 당신이 죽을 때 처절하게 우신 것이 아니라,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가족들과 유대인들 앞에서 통곡하셨다고 성경에 기록돼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남자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눈물을 보이는 것은 연약함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는 동일하게 전승되는 가르침 같습니다. 


'남자는 눈물을 보이면 안 돼!' 


말씀을 듣고 계시던 할머니는 정말 그런 것 같다며 당신의 남편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퇴원하면 남편에게 이야기를 꼭 들려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당신도 힘들면 울어도 돼요, 예수님도 우셨으니까!"라고 말입니다. 




슬픈 일을 당해 우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또, 눈물은 우리 몸이 슬픔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려는 과학적인 작용이기도 합니다. 실컷 울고 나면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껴 본 적이 있으세요? 슬픔을 제대로 경험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기억이나 인지적 기능이 더 활발해진다는 실험 결과를 책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 뇌가 슬픔을 제대로 경험할 때, 정체되지 않고 앞으로 나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는 것으로 저는 해석합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이 꼭 눈물을 흘리는 일일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이는 그림을 그리고, 어떤 이는 노래를 부르고, 또, 어떤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각자 표현방식은 다를 수 있지만, 안전하고 편안한 곳에서는 한 번쯤 목놓아 울어보세요 눈물을 잊은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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