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절벽 속 흰 사슴

by 므므무

A는 붉은 산을 올랐다. 이 산에는 영물이라 불리는 하얀 수사슴이 산다고 했다. 영물이라 하면 흔히 그렇듯, 수사슴의 뿔을 만지면 만수무강과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 들었다. 만수무강이든 부귀영화든 A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것들이었다.


하루는 건너편에 사는 60대 B가 A의 집 문을 두드렸다. B는 허름한 추리닝 차림으로 너털웃음을 짓더니, 가진 게 없으면 노력이라도 하라며 A를 비웃었다. 칼날 같은 조롱이었지만 이미 무시와 질타에 익숙해진 A에게는 따끔한 정도의 말이었다. A는 더듬거리며 다음 주에는 산에 오를 예정이라고 말했다. B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거라도 해야 한다며 A를 위하는 척 어깨를 토닥였다.


B는 만수무강과 부귀영화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60대의 나이에도 B는 매일 아침 1km씩 가벼운 몸으로 뛰었으며, 그 흔한 감기에도 잘 걸리지 않았다. B의 뒷주머니에 자리 잡은 체크카드에는 ‘0’이 7개 이하로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A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었다. A는 하루가 멀다 하고 병에 걸렸고, 끝내는 일주일 전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집세가 밀리다 못해 쌓였지만, 시한부 이야기를 들은 집주인의 배려로 죽기 전까지 지금 집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하루 종일 방에서 뒹굴며 죽는 날만 기다리던 A는 문득 전에 B에게 들었던 수사슴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숨을 헐떡이며 걷는 A의 앞에 거대한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새빨갛게 익은 바위들이 끝없는 아래로 패인 모습은 A가 방안에 누워 상상해본 저승 문과 닮아있었다. B에게 들은 말로는 이 붉게 타오르는 절벽 중간에 푸른 호수로 이어지는 동굴이 있다고 했다. A는 준비해온 밧줄을 가장 튼실해 보이는 나무에 묶고는 자신의 허리에도 묶었다. 나무에 비해 한없이 얇은 허리를 보니 A 자신이 얼마나 작고 하찮은 존재인지 느껴졌다. A는 이미 포기한 삶이 끝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두 다리를 움직여 절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떨리던 손이 슬슬 익숙해졌을 때쯤 반대편 절벽에 뚫린 구멍이 A의 눈에 들어왔다. A는 구멍을 비집고 나온 빛을 느끼고는 급하게 밧줄을 풀며 아래로 내려갔다. A가 구멍 맞은편에 도착해 고개를 돌리자 구멍의 빛이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A의 심장이 설렘과 두려움으로 쿵쾅대기 시작했다. A는 오랜만에 열을 올리는 심장에 살아있음을 느꼈다.


안타깝지만 A의 삶에 대한 희망은 반대편 절벽으로 뛰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살기 위해 구멍으로 가야 하는 A는 죽기 싫어서 구멍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절벽을 뛰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밧줄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A는 차라리 수사슴이 이쪽으로 뛰어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인간을 먼저 찾아오는 생물은 영물일 수 없었다.


A는 반대편의 구멍 위치를 다시 확인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조정했다. 두 다리가 부러지더라도 A가 조금이라도 더 위에 있는 편이 알맞게 도착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A는 적당하다 싶은 위치에 다다르자마자 심호흡만 한번 하고는 곧장 몸을 돌려 뛰어버렸다. 더 두려워하기 전에 몸을 던지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허공에 던져진 신체를 느끼며 A는 곧 만나게 될 하얀 수사슴을 떠올렸다. 상상 속의 영물은 푸른 구멍 입구에서 가만히 A를 바라보고 있었다. A가 입을 열기도 전에 수사슴은 붉은 눈으로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A는 뿔을 만지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수사슴은 미동 없이 A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애타는 마음에 A는 손을 더 앞으로 내밀었다. A의 손이 가까이 다가오자 수사슴은 뒤로 다섯 걸음 정도 물러섰다.


A가 상상 속에서나마 영물에 닿기도 전에, A의 몸이 구멍 바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A는 신체의 앞면에 알싸하게 퍼지는 고통과 데일 듯한 뜨거움을 느꼈다. 공포에 눈을 찡그렸던 A는 조심스럽게 눈꺼풀을 들었다. A의 몸 바로 아래로 뜨거운 액체가 느껴졌다. A는 붉은 산은 물도 붉고 뜨겁다는 생각에 신기해했다. A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눈알을 굴려 시선을 구멍 안으로 돌렸다.


푸른빛이 눈부신 구멍 안에는 A가 상상했던 외형 그대로의 하얀 사슴이 있었다. 그러나 상상과 달리 사슴은 A처럼 붉은 물 위에 누워있었다. A는 사슴 옆에 서 있는 다른 인물을 발견하고는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수사슴에 대해 말해줬던 B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사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A는 까맣게 으스러져가는 의식 속에서 마지막까지 B의 늠름한 자태를 눈에 담았다. 붉은 산속 푸른 동굴 안에는 A가 꿈꾸던 것이 모두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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