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의 경계선
며칠 전, 취재 때문에 와인 시음 이벤트에 갔었다. 역시 예상한 대로 커플 지옥이어서 내 주위의 고요한 정적을 깨려고 옆에 혼자 앉아있던 30대 남자에게 말을 건냈다. "어떻게 오셨어요?"
공무원인데 컴퓨터 보안 관련 일을 한다는 남자의 입에서는 와인 한두 잔이 들어가니 본인의 비트코인 채굴 경험, 전현무-한혜진 연애에서 북한 해커, 그리고 회사 이야기까지 술술 나왔다.
"요새 그 Me too 때문에 함부로 여직원한테 예쁘다고 칭찬도 못하겠어요. 그 얘기도 못하면 앞으로 무슨 얘기를 하라는 거죠?"
마음속으로 "외모 말고 할 얘기가 없으시나 보죠"라고 외쳤지만 표정관리를 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몇 주전에 한 여대에 다니는 친한 언니와의 대화가 생각났다.
언니가 다니는 여대는 채플을 매주 의무적으로 가야 된다고 한다. 큰 강당에서 이뤄지는 채플에 하루는 장애가 있는 한 가수가 공연을 왔다 (성악가인지 가수인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일단 가수라고 쓰겠다).
거동이 불편한 분이셨는데 공연을 시작하기 전에 무대에서 "여기 오신 학생분들이 너무 아름다우시네요"라며 인사를 했다고 한다.
참고로. 언니에 의하면 그 여대 학생들은 밖에서 받는 편견 때문인지 외모에 대한 코멘트에 아주 예민하다고 한다. 또한 여대인만큼 페미니즘에 관심이 굉장히 많고 관련된 활동도 대다수가 활발하게 참여를 한다고 한다.
그 가수가 "아름답다"라는 말을 했을 때 갑자기 큰 강당의 분위기가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해졌다고 한다. 가수는 전달이 잘 안된 줄 알고 다시 청중들에게 "아름답다"라는 금기어(?)를 내뱉었고 분위기는 돌이킬 수 없이 더 싸해졌다고 한다. 어색한 듯 노래를 이어나가는 가수에게 청중은 호응과 박수는커녕 팔짱을 끼고 가수를 냉기가 어린 시선으로 주시했다고 한다.
시계의 초침이 채플의 끝을 가리키는 순간 여학생들은 의자를 드르륵드르륵 밀면서 강당을 빠져나갔고 언니는 얼굴이 화끈거려서 차마 가수의 얼굴도 못 보고 서둘러서 강당을 빠져나왔다고 한다.
언니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학생들이 했던 행위는 개인을 향한 단체적 폭력이었다고. 일단 별 의도 없이 인사치레로 한 말을 왜 그렇게까지 불편하게 받아들이고, 불편했으면 차라리 일어서서 왜 불편한지 공개적으로 발언을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 여대의 진보적 학풍에 대해서 몰랐을 그 가수는 본인이 장애인이라서 그런 대우를 받았을 것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도 있는 게 언니는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추가: 그 채플에 있었던 다른 학생들의 경험을 코멘트로 읽었습니다. 그 가수께서 외모 비하 등 타인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발언을 여러 번 하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배경을 최대한 정확하게 쓰고 싶은 바램에 이렇게 추가합니다. 이 점 고려해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가 미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 "hello, handsome gents, and beautiful ladies" 란 말로 MC가 콘서트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에서도 심심찮게 행사를 주관하는 엠씨가 관중들을 향해 예쁘고 잘생겼다는 말을 던진다. 얼마 전에 엄마가 내가 다니는 회사 단체사진을 보고 "너네 회사는 얼굴 보고 사람 뽑니"하는 칭찬(?)을 던지신 적이 있다.
와인 이벤트에서 만난 남자는 내게 말했다. "도대체 예쁘다는 말이 어때서요? 칭찬인데."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여성을 향한 "예쁘다"는 코멘트는 순수한 칭찬으로 인식이 된다.
나는 사실 예쁘다는 말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아, 오해는 없도록 하자. 내가 그렇게 예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는 소리는 아니다).
싱가포르에서 경제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주로 내가 인터뷰하는 사람들은 30-50대 금융계/대기업에 종사하는 남성이었다. 인터뷰를 하려고 마주 앉으면 "예쁜 한국 여자가 와서 기쁘다, " "나도 한국에 가면 당신 같은 사람과 데이트할 수 있나, " "왜 한국 여자들은 다 예쁘니, 성형해서인가, " 등 인사 아닌 인사를 쏟아내는 남성들이 꽤 많았다 (아, 가끔씩 허리나 어깨 터치는 덤이었다).
그 사람들과 영양가 있는 인터뷰를 하려고 밤새 생소한 싱가포르 정부 정책이나 부동산 시장에 대해 줄 치면서 공부해갔는데 나를 피디 말고 순전히 여자로만 보는 인터뷰이를 만나면 맥이 빠졌다. 손에 형광펜 자국으로 가득한 질문지를 쥐고 나는 칭찬 아닌 칭찬에 "thank you" 대신 싸늘한 미소를 유지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다.
"예쁘다"의 사용법이 애매한 순간이 많은 만큼 나 또한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얼마 전에 같이 일하는 여자 동료가 그날따라 머리를 내리고 옅게 화장을 했는데 너무 예뻐 보여서 "너무 오늘 청순하고 예뻐요!"라는 칭찬을 했다.
그런데 같이 일하는 젠더학을 공부한 친구가 바로 내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that is work place harassment! (직장 내 희롱)"이라고 했다.
난 바로 항의했다. "왜, 예쁘다는 게 어때서!" --- 생각해보니 와인 이벤트의 남자가 한 말이다.
어렵다. 칭찬에 대한 건강한 경계선은 어디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