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버거운 사람들
시계가 오후 6시 30분을 가리키자마자 나도 모르게 숨을 참고 핸드폰 화면만 들여다보았다.
두 달 가까이 기다린 사주 예약이 잡힌 시간이기 때문이다.
약속된 시간보다 2분 뒤, 핸드폰이 울렸고 동시에 내 사주를 나타내는 만세력 차트가 문자메시지로 왔다.
유명 유튜버의 사주를 정확히 맞춰서 유명해진 박 씨 아저씨는 인사를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 이제 사주를 읊어드릴게요. 일단 궁금하신 것은 건강, 커리어, 애정 운, 그리고 미래잖아요. 차례로 말씀드릴게요."
그는 차트에 있는 한자와 숫자를 랩 하듯 빠르게 말하면서 나의 지나온 29년의 인생과 앞으로 남은 시간을 설명해나갔다.
"일단 글 쓰는 직업 같고. 아마 피디나 작가 하시면 딱 어울리겠네"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그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딱 내 이름,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간밖에 없다.
"작년에 건강이 안 좋았겠네. 올해부터는 좀 나아지고... 작년에 만났던 사람은 왜 만난 거야? 잘 안 맞는데."
어디에선가 나를 몰래 들여다본 것 같았다.
"27살부터 일이 좀 풀렸겠네."
딱 그때 지금 다니는 회사에 취업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역마살이 왜 이렇게 많아? 외국에서 살면 좋을 것 같아."
11살 때부터 외국을 떠돌면서 살았다는 설명도 아꼈다.
넌지시 물어봤다. "공부도 외국에서 더 해야 할까요?"
"공부는 올해부터 하면 좋을 것 같아. 외국 나가면 좋지."
사실 전부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나는 작년부터 사주에만 몇십만 원을 썼다.
사주를 보려고 부산에 유명하다는 모 선원을 아침 7시부터 찾아가서 줄을 섰으며 친구에게 추천받은 페미니스트 사주가에게 카카오톡과 이메일을 통해 몇 달에 한 번씩 운세를 체크했다.
그들은 공통되게 내가 1) 겨울에 태어난 물이 많은 나무라서 아플 팔자며, 2) 언론 쪽이 잘 어울리고, 3) 역마살이 있으며, 4) 결혼은 늦게 한다고 입을 모았다.
문득 오늘 생각이 들었다. 이미 대충 내 '팔자'를 아는데도 나는 왜 그렇게 사주를 보러 다니는지.
정확히 몇 살에 결혼하면 좋을지까지 집어주면서도, 사주 풀이하는 분들이 절대 내게 말해주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미래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다.
"부산 사주 보시는 분이 제 인생은 대박 아니면 쪽박이래요. 그중에 어떤 거죠?" 이번에 사주를 본 박 씨 아저씨게 여쭤봤다.
그는 황당하다는 듯 웃다가 대통령 사주와 정확히 같은 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난 이야기를 했다.
"그 사람 지금 뭐하는지 알아요? 마을 이장하고 있어요. 사주가 같아도 자기 삶은 자기 하기 나름이에요."
친한 오빠한테 그 얘기를 해줬다.
"마을 이장? 대통령보다 행복할 것 같은데?"
모든 사주풀이가 같지는 않다.
부산에 있는 할아버지는 내게 30대 초반에 큰 이변이 한번 있고 그것을 견디면 쭉 회사를 잘 다닐 것이라고 하셨다. 서울 박 씨 아저씨는 내게 사주가 "세서" 회사생활보다는 자유로운 프리랜서의 길을 추천하셨다. 기사보다는 창의적인 글을 쓰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다고 하셨다.
귀가 엄청 얇은 나의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부산과 서울을 오간다.
차마 몰랐으면 하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 사주를 많이 봐서 다수의 의견을 따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복비가 아깝지 않냐는 주변의 걱정은 잘 들리지 않는다. 이 정도면 중독이다.
혹자는 마음이 불안하거나 약한 사람들이 이런 '샤머니즘'에 의존한다고 한다.
하지만 내 주위에 사주를 보러 다니는 친구들은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강한 사람들이다. 사주를 꽤 자주 보지만 모든 의사결정은 마음과 머리 사이에서 나온다. 사주는 그들의 선택을 지지해주는 메아리 역할을 할 뿐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어쩌면 내게 사주는 종교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몇 년 전, 외국에서 일할 때 생기는 고충에 대해 쓴 나의 글에 어떤 분이 댓글을 남기셨다.
내 고충이 공감이 된다면서, 이상한만큼 원하는 대로 안 풀린 지난 몇 년에 대해 차라리 운 탓을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나도 괜스레 안 좋은 건강에 대해 사주 탓을 해봤다 (사주에 의하면 작년이 고비라고 한다). 내년에 건강이 괜찮을 것이라는 박 씨 아저씨의 말을 들으니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문득 1994년 1월 중순, 나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태어난 사람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사나 궁금해졌다.
그들도 글을 좋아할까? 돈도 "먹고 살만큼만" 벌까? 사주에 목(木)이 많은 그들도 나처럼 소나무를 좋아할까? 나처럼 내일이 항상 두려울까?
생각해보니 박 씨 아저씨께 신년 운세를 물어봤어야 하는데 그 중요한 것을 까먹었다.
딱 신년 사주만 보고 사주는 당분간 끊어야겠다.
사주는 내일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메인 커버포토는 정새난슬 가수, 일러스트레이터 님의 그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