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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won Jan 03. 2023

뇌 기증 서약 후기

 

작년에 제일 잘한 일을 꼽으라면... 한참을 생각했다.


2022년은 솔직히 말하자면 내게는 a big bad blur (흐리멍덩한 최악의 상태?)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일 년 내내 신경과, 내분비내과, 안과, 외과 등을 돌아다녔지만 몸은 한없이 아프고 머리는 지끈거렸다. 너무 몸이 안 좋은 나머지 인생 처음 신점까지 봤고, 무당에게 "제가 신내림을 받아야 하는 팔자"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무당은 웃으면서 그럴 일은 절대 없다고 했다).




9월 어느 날, 아산병원에서 진료를 마치고 출구로 향하는 내 눈에 한 배너가 눈에 띄었다


'뇌기증 등록 절차'


나의 충동성은 바로 배너에 있는 전화번호로 연락을 하게 했다. 장기 기증에 대한 생각은 얕게 해 본 적은 있지만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 몰랐는데 바로 앞에서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노트: 뇌 기증이란 연구를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사망 후 뇌를 뇌은행에 기증하는 것을 말한다. 뇌기증에 동의하면 절차를 거친 뒤 연구에 사용하게 된다).


 기증이란 연구를 목적으로 이용할  있도록 사망  뇌를 뇌은행에 기증하는 것을 말한다.

배너를 보고 전화를 하니 몇 분뒤 담당자가 달려와서 조용한 방으로 나를 데려갔다.



방에서 3-4장 되는 개인정보 확인서를 주셨다. 친가와 외가 병 내력과 개인 병 내력, 주량, 흡연 임신 유무 등을 적어야 하는데 할머니가 무슨 암으로 돌아가셨는 기억이 안 나서 엄마한테 전화까지 했다. 참고로 뇌사자의 뇌는 신경세포가 모두 죽어있는 상태라서 연구에 활용될 수 없기 때문에 기증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서류에서 내 뇌를 연구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관 (대학교, 공공연구기관, 메디컬 회사 등)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사망 시 병원에 연락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의 연락처도 적었다. 나는 동생의 번호를 적었다.


(노트: 사망 후 유가족이 병원으로 연락을 하면 절차가 시작된다. 시신은 부검을 통해 뇌은행에 보관되고 추후 연구용으로 분양된다).


찬찬히 서류를 작성하면서 평소에 비교적 멀게 느껴지는 '죽음'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 볼 수 있었다. 나의 건강 상태와 특정 질병에 걸릴 가능성, 그리고 확률적으로 나보다 늦게 죽으면서 병원에 연락해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등... (동생아, 미리 고맙다...)


담당자분께 내 뇌를 특정 연구에 사용할 수 있도록 요청해도 되냐고 여쭤봤더니 아직은 뇌 기부가 활발하지 않아서 따로 요청하는 항목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일단 적어놓으면 먼 미래에는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고 하셔서 우울증 연구에 내 뇌를 써달라고 조그맣게 적어놨다.


개인정보 확인서 작성 후 기증 서약서를 사인했다. 담당 교수의 확인 후 희망카드를 집으로 보내준다고 했다 (배송 기간은 열흘 넘게 걸렸다. 교수가 출장 중이었다).




전에 상담가가 내게 해주신 말씀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본인이 세상에 쓸모없다는 생각이 들면 우울증에 걸린다는 말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내 존재의 무력감과 하찮음에 대해 혼란스러워해 왔다.  


진료를 받고 울적했던 마음이, 뇌 기증 서약을 하고 나온 뒤 개운해졌다.


태어나서 내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이 물밀려 왔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병원 앞에서 숨죽여 울었다.





아산병원 담당자분께서 작년 1-9월 기준으로 약 60건 정도의 기증이 들어왔다고 하셨다.


현대 의학이 많이 발전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우리 뇌에 대해 모르는 것들이 참 많다.


우울증만 해도 내가 가본 병원마다 의사의 소견이 다르고 약도 다양하다. Trial and error을 통해 맞는 약을 아직도 찾아가는 중이다. ADHD 같은 경우에는 (나의 의사 선생님이 ADHD 검사 결과 내가 병원에서 "탑 파이브"안에 든다고 말씀해 주셨다) 계속 약을 먹으며 충동성을 억제하고 날뛰는 감정을 조절해야 한다.


인간이 우주까지 가는 세상이지만 뇌는 우리에게 아직 미지의 섬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항해를 해야 하지 않을까.


뇌 기증 희망카드를 받은 날 쓴 글이다.


"너무나 내게는 어렵고, 불완전한 나의 뇌가,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With much love and hope."


 With much love and 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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