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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won Jun 21. 2023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

어쩌다 정신병원 (3)

정신병동에서 이틀정도 멍을 때리니 슬슬 심심해지기 시작했다.


애초 잠을 실컷 자려고 입원에 동의했지만, 현실은 유감스럽게 인간개조 캠프였다. 교수님과 약속한 대로 계속 깨어있으려고 병동을 걸어 다녔다.


병동을 찬찬히 둘러보다 보니 정신병동만의 특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브란스 정신병동은 폐쇄와 개방병동이 있다. 둘 다 광혜관에 있다.


폐쇄병동은 3층에 있는데 아예 나는 들어갈 수가 없다. 거기로 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도 따로 있다. 내가 있던 개방병동은 4층에 위치해 있고 비교적 출입이 자유롭다. 폐쇄병동은 금지된 물품도 많은데 개방병동은 뾰족한 물건 빼고 괜찮은 것 같다.


병동 규칙


세브란스 개방병동에는 4인실과 1인실이 있는데 나는 4인실을 선택했다. 굳이 병원 싱글룸에 돈을 날리고 싶지는 않았다.


정신병동의 모든 창문은 굳게 닫혀있다. 틈은 실리콘으로 발라놔서 도저히 열 방법이 없다.


내 침상 뷰와 굳게 닫혀있는 창문


병실을 나와서 쭉 걸어오면 로비가 있고 오른쪽에는 정수기와 의자가 있는 공용공간이 있다. 답답한 느낌이 들 때 거기에서 나무 뷰가 있는 창밖을 바라봤다. 물론 여기 창문도 굳게 닫혀있다.


힐링이 되는 공용공간 나무 뷰




입원 중 가끔씩 감정 조절이 어려워서 울음이 터져 나오는 때가 있었다.


침대에 누워있다가, 교수님과 면담 중, 창문을 보고 있다가, 랜덤 한 순간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럴 때 아, 내가 입원한 이유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있을 때는 복도 끝 병동 밖에 있는 화장실로 달려가서 엉엉 울기도 했다.


화장실 창문 너머로 연대생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고 현재 내 상황과 대조가 되어 현타가 올 때도 있었다. 그럴 때 에너지가 넘쳐났던 나의 대학생활까지 뭉개 뭉개 생각나서 더욱 우울해졌다.


최애 화장실 뷰


교수님이 나를 포함한 많은 우울증 환자들은 과거의 기억을 과도하게 반추하는 습관이 있다고 하셨다.


그렇게 과거의 기억을 계속 소환해서 재생하면 더욱 기분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고 악순환이 되기 때문에 과거 기억이 올라올 때 생각을 끊어내는 연습을 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현타가 올 때면 딴 일을 하며 생각을 분산시키려고 노력했다.


또 과거를 떠올리며 성찰하고 배우는 것과 습관이 되어버린 되새김질을 구분해야 한다고 하셨다. 여러모로 섬세하고 통찰력 있는 교수님의 조언에 매일 회진 시간이 기다려졌다.



정신병동의 병실 안은 꽤 단조롭다.


옷을 걸 수 있는 라커, 조그만 냉장고, 침대와 보호자를 위한 의자 겸 간이침대뿐이다.


병실 안 공용 화장실에서 샤워를 할 수 있는데, 하나 특이한 점은 천장에서 물이 나온다는 점이다. 샤워기 호스줄이 없다. 이유는… 짐작한 그대로이다.


천장에 있는 구멍에서 물이 나온다


입원 전까지만 해도 나는 ‘정신병동’하면 약에 몽롱해진 환자들이 좀비같이 잠을 자고 어두컴컴한 폐쇄적인 환경을 상상했다. 아마 매스컴에 등장한 문제가 있는 몇 정신병원은 실제로 이럴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있는 정신병동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맘껏 울어도, 이유 없이 불안해해도 눈초리 대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


내가 나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는 상황이 있을까 봐 걱정을 했는데 즉각 대처를 해줄 수 있는 전문가들이 가까이 상주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이 되기도 했다.


이십 대 전반에 걸쳐서, 열심히 인생의 퀘스트를 하나둘씩 이뤄가면서 오히려 내 마음의 불안은 풍선을 불 때처럼 점점 커졌던 것 같다. 목표를 이뤄서 오는 성취감보다 쌓았던 모래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나를 엄습했다. 첫 직장에서 겪었던 나의 #미투 사건 후 따라온 실직은 아마 이 불안감을 증폭시키는데 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이런저런 이유로, 차곡차곡 오랜 세월 쌓인 트라마와 거기서 파생된 힘든 감정들은 결국 입원 전 나를 완전히 삼켰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자 반강제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일이나 계획을 미루거나 포기하고 병원에 들어갔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간 세브란스 정신병동에서 아이러니하게 마음의 평화를 느꼈다. 모래성은 허물어졌지만, 나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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