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싹한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

『저주 토끼』, 정보라, 래빗홀

by 여행하는나무


“이 책은 환상호러 단편집입니다. 독자 여러분, 즐겁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부디 오싹한 즐거움을 느끼며 팍팍하고 재미없는 현실로부터 잠깐 떠나시면 좋겠습니다. 단, 심장이 약한 분들이나 임산부는 이 책을 신중하게 펼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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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 대해서나 작품에 대해서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만난 책,『저주 토끼』.

제목도, 표지도 조금 으스스한 느낌이다. 뒤돌아보는 토끼의 빨간 눈과 주변 배경이 환상 속으로 끌고 갈 것은 분위기를 풍긴다. 꾸미는 말이나 화려한 묘사가 아닌 담백한 문장으로 옛이야기 들려주듯이 서술 중심으로 빠르게 전개하여 술술 금방 다 읽었다. 느낌은 어땠냐고? 유감스럽게도 나는 작가의 바람대로 이 책을 만나지 못했다. 재미있지 않았다. 환상호러인데, 오싹한 즐거움을 별로 못 느꼈다. 그렇다고 엄청 무섭거나 끔찍하지는 않았다.


작가는 온갖 소재들을 글감으로 하여 환상호러 소설을 세상에 내놓았다. 재기 발랄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환상적인 세계를 만들어 상식적인 사람들이 가진 생각의 틀을 흔들었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읽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뭐 이런 이야기가 다 있어? 상상력 한번 대단하네!’

이상하고 의아해하면서 이 작품 속에 어떤 메시지가 들어있을까, 숨은 그림 찾듯이 ‘의미’를 찾는 나를 발견했을 뿐이다. 단편적인 ‘재미’ 보다는 인생의 ‘의미’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일까? 훌륭한 작품은 감각적인 재미와 함께 의미(메시지)를 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내 생각일까? 주입식으로 교육받은 외부적인 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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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 토끼』는 대중 문학의 한 부류인 장르 문학에 속하는 환상호러 작품이다. 이 분야에 특화된 정보라 작가의 소설집이다. 모두 10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내가 공포를 느꼈는지, 즐거움을 느꼈는지, 그것과는 별개로 작가의 상상력과 표현력은 놀랍기 그지없다. 변기에서 ‘머리’가 불쑥 나온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됐을까? 나의 머리카락과 배설물을 먹고 자라는 나의 분신이자 자식이었던 존재가 나를 변기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 이미지가 떠오르면서 소름이 돋는다. <머리>

매일 볼일을 보는 화장실 변기, 배설을 위한 편리한 도구라는 감탄에 그치는 사람과 작은 생각의 씨앗을 살려 소설로 만들어내는 작가의 눈은 확실히 다르다. 그에게는 생활 속 모든 이야기나 도구들마저 소설의 소재가 되나 보다.

여성의 생리불순은 피임약 복용으로 인한 자연 임신으로 바뀐다. “상상 임신”도 가능하니 밖으로 배출되지 못하여 응축된 핏덩이가 아이처럼 자궁에 자리 잡는 일도 가능하려나? <몸하다>


옛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온 듯한 <덫><흉터>는 괴기스럽고 끔찍하다. 끝을 모르는 탐욕은 인간을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괴물로 만든다. 가족 관계를 파괴하고 끝내는 자신마저 지옥으로 몰아간다. 동굴에 던져진 재물 소년의 골수를 파먹는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도대체 무엇을 얻고자 그렇게 하는지...


억울하고 분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등쳐먹고 빼앗아가고 쇠사슬에 몸을 묶고 골수까지 파먹는다. ‘상처 입고 짓밟힌 사람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 저주 마법의 힘이라도 빌리고 싶다. 저주토끼는 악랄한 재벌 술도가 집안 삼대를 뿌리까지 갉아먹고 죽음에 이를 때까지 저주의 마법을 부린다. 그림책 속의 단골 주인공으로 나오는 귀여운 토끼는 저주토끼가 되어 악을 응징하는 복수의 화신이 된다. <저주토끼>

공적인 정의가 실현되지 못한 세상에서는 사적인 응징이 마법의 힘이라도 빌려 그 위력을 드러낸다. 그러면 세상에서 모든 악인들이 사라지고, 억울하고 짓밟힌 사람들이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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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편의 단편 중에서 그래도 조금 현실감 있게 다가온 것은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 속 초원 공주 캐릭터였다. 황금배의 주인과 공주의 대화가 인상적이었다. 황금 배의 주인은 눈먼 왕자의 저주를 없애달라고 자신을 찾아온 용감한 공주에게 무한의 삶을 약속하며 함께 할 것을 권유한다.


"나는 인간으로 살고 싶어요."

공주가 마침내 대답했다.

"나와 같은 인간 남자를 만나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그 아이가 또 어른이 되어 짝을 찾고 자손을 낳는 모습을 보고.... 그런 삶을 살고 싶어요."

"그런 삶의 끝에는 죽음이 있다."

바람과 모래의 주인이 조용히 말했다.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하지만 죽음이 오기 전까지는 살아갈 테니까요.”

-그렇다면 인간의 시간이 끝난 뒤에 나에게 오라."

황금 배의 남자가 제안했다.

"공주에게 인간의 삶은 줄 수 없지만, 대신 인간이 알지 못하는 평온과 무한을 약속하겠다."

공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319-320


공주의 대답이 인상적이다. 공주는 영원히 죽지 않는 무위로운 안락보다는 죽음이 있고, 온갖 희로애락을 온몸으로 경험할 것이 분명한 인간의 삶을 선택한다. 참으로 인간다운 공주가 당당하고 멋지다.


마지막 단편 <재회>는 환상호러라기보다는 트라우마를 다룬 심리소설에 가깝다. 과거에 묶인 사람들은 ‘오직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과거의 시간 속에 자신을 ‘묶어야’ 편안함을 느낀다.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현재를 살지 못한다. 인간의 삶이 아니라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생존이 유일한 삶의 화두이자 목표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슬프고 안타깝다.


이 안타깝고 슬픈 마음은 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공감의 마음에서 나왔을 것이다. 현재를 살지 못하고 무언가에 자신을 묶어두어야 안전하고 편안하다고 느낀다. 자유는 희망사항이고 환상일 뿐, 우리도 무엇인가에 묶여있다. 술이나 약물이나 도박에 묶인 사람들은 그래도 약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다. 바쁜 일, 중독에 가까운 관계, 돈이나 권력이나 지위, 인기의 유혹에 묶인 사람들은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감춘다. 생각이나 관념, 믿음 체계도 때로 우리를 묶어둔다. 나는 무엇에 묶여있는가? 나 또한 이런저런 것들에 조금씩 발을 담그고 나를 묶어놓고 있음을 인정한다.


매일 뉴스를 장식하는 온갖 사건 사고들이 우리를 심란하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요지경 세상이 환상호러 소설보다 더 환상호러에 가까운 게 아닐까 문득 생각한다. 그래서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 속 이야기들이 더 이상 오싹한 즐거움을 주는 환상호러가 되지 못한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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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토끼>는 환상호러 단편집이고, 환상호러 장르는 대중문학에 속하며, 대중문학은 교훈이나 가르침보다는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는 장르이다. 그러므로 즐겁게 읽어주시면 좋겠다. 자기 입으로 '호러'라고 해놓고 즐겁게 읽어달라니 모순되는 것 같지만 오싹한 즐거움을 느껴주시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정보라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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