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는 여행
빽빽하게 서있기도 힘든 출근길.
전철에서 시작한 아침은
오늘도 우리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지금 몇 호선을 타고 회사로 향하고 있나요?
저는 4호선과 2호선을 타고
재수학원과 고시학원을 다녔습니다.
충무로역에서 교대역으로,
사당역에서 강남역으로
재수학원 다니던 시절엔 대학생들이 부러웠고
고시학원을 다닐 때는 회사를 향하는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취업준비생 시절 얼마나 빽빽한 러시아워의
전철을 타게 될 날을 꿈꾸었나요?
그런데 취업 후 얼마 되지 않아 마주하는 현실의 벽은 나의 존재를 무너뜨리는 아찔함의 연속입니다.
부속품으로 점점 변해가는 거울 건너편의
사람은 과연 누구인지 고민하는 시간이 반복되며
고민을 넘어 회의에 다다른 순간
이렇게 조용히 속삭입니다.
“나는 왜 태어났지?”
“나는 왜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지?”
철학의 탄생입니다.
존재 의미를 고민하는 시간은
나 자신을 잃어버렸음을
자신에게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동시에 나 자신을 찾고 싶은 간절함입니다.
이 간절함을 대수롭지 않게 지나친다면
삶의 공허함과 자책이 인격을 잡아먹기 시작합니다.
소리 없이 자아가 다치고 닳게 되면서 자아가 사라지는 상황에 이르면 죽음의 그림자가 아른거립니다.
자신에게 너무 미안하고, 자신을 지킬 힘이
소진되어 넘어질 힘도 없음에 삶의 의지를 놓아버립니다.
돈과 직업보다 더 중요한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퇴사를 결심합니다.
남은 사람들도 멀쩡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실패라는 단어로 그 선택을 평가하고 폄하합니다.
그 과정이 실패라면, 실패는 나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내 삶의 목적과 그에 걸맞은 직업의 옷을 찾는 여정입니다.
이 여정은 세상의 시선으로만 채웠던 내면을 ‘나’로 채워가는 여행입니다.
우리의 여행은 비어있던 내면의 수레를 채우며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철학을 만들어 냅니다.
수많은 인생이라는 별들이 있지만
나의 별은 오직 하나, 한 번뿐입니다.
‘나’가 내 안에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어야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수레가 됩니다.
이 철학은 가치가 되어 나의 수레를 채웁니다.
인생은 나 자신을 찾는 여행이기 때문에
고군분투하며 찾지만 그 과정의 기준이 ‘나’가 아닌
‘타인의 시선, 인정’이라면 ‘나’는 사라집니다.
빈수레가 되는 일은 남의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인생 선배들의 속담과 사자성어는
인생의 어려움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빈수레가 요란하다.”
“경거망동”
남을 비웃으며 툭 내뱉는 이 말을 사용합니다.
수레가 황망하게 요란하게 움직이는 이유는
가볍기 때문입니다.
누가 자기 자신을 가벼운 수레라고 생각할까요?
없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선배들은 한탄합니다..
“내가 빈수레였다. 가족도, 삶도, 남아있지 않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메시지와 타인의 평가에 예민한 현대인의 인생을 한마디로 표현한 단어가 있습니다.
커리어입니다.
“나 이런 사람이야!!”
왜 가벼울 수밖에 없을까요?
매스컴, 국가, 학교, 사회의 메시지에 나 자신을 맡기며 선택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도록 겁주고, 혁신가들에게
억누르며 튀지 말라며 협박합니다.
그들의 기준을 통과하면 감투와 보상을 주겠다고,
인정해주겠다고 달랩니다.
커리어는 이렇게 인정받는 삶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듭니다.
분명 내 인생의 대가를 보상받고 성취감을
누리는 커리어는 중요합니다.
커리어를 쌓는 일은 내 삶에 돈을 공급하며
생존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커리어를 위해 어린 나의 아이들과 가족과의
행복을 포기하고 끊임없는 경주마로 달립니다.
안타깝게도 경주마는 지치고 넘어지고 버려집니다.
커리어에 집중하는 삶은 아이러니하게도
인생을 혼돈에 빠뜨립니다.
혼돈은 권력자들이 움직이는 배경입니다.
내 안의 살아서 꿈틀거리는 욕망을 누르고
감정을 지우려 애쓰며 몸부림치지만 ‘나’는
꿈틀거립니다.
빈수레를 채우는 일은 꿈틀거리는 나의 욕망을
마음껏 인생에 그려내는 예술입니다.
저는 대학 진학도 단번에 못했고,
고시도 떨어졌고, 취업도 실패하였습니다.
멍하니 실패한 인생을 바라보았습니다.
창업도 실패하였습니다.
대학시절 주식으로 불린 돈으로
시작한 창업에도 실패하고 나서는
완전 빈털터리가 되어서 부모님에 집에 얹혀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상선약수 시간에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빈수레였음을 인정하자 채워야 할 것들과
약한 것들이 보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레는 단단해졌고,
자존심을 버리고 빈 수레를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카페를 빌려 과외 설명회로 학생을 모으고,
밤에는 과외를 하고 재기할 수 있는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과외를 시작한 이유는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돈벌이였기 때문입니다.
낮에는 단순한 배너 작업부터 세금, 임대차 계약, 영업에 필요한 요리, 재료를 다루는 연습을 매일매일 하면서 팔리는 메뉴를 만들기 시작했죠.
1주일에 5일은 새벽 1시까지 과외를 했고
매일매일 작은 주방에서 메뉴를 연습했습니다.
정해진 코스의 길을 걷던 제게 가슴의 욕망의 이미지를 만들어 평가받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냉혹한 평가 뒤 달리는 별 1개와 환불 요구는
쉴 새 없이 마음을 흔들어댑니다.
그러나 꿈틀거리는 내면의 욕망을 눈앞에 그려내는 일은 인생의 불꽃이 되어 오히려 열정을 타오르게 합니다.
‘맛있다’
계속된 실패에서 허우적대던 과정에서
잠깐씩 찾아오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은
참된 기쁨과 성취의 시간입니다.
생존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경험을 통해
우리의 호흡을 이어가는 찰나의 연속입니다.
이것이 인생 아닐까요?
남의 시선이 아닌 나를 찾아가는 여정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인정받는 커리어를 내려놓고 꿈틀거리는 욕망을 따라 성취감을 맛보는 일을 선택하는 일은 공포에 가깝습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곡예의 공포를 마주할 때,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빈수레는 아닙니다.
황망하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흔들려도 요란하지 않습니다.
‘나’로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나’가 채워지니 어루만져줄 ‘너’가 보이고
함께 하고 싶은 ‘우리’가 되고 싶습니다.
사람이 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