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버른 차이나타운
호주 멜버른에서 몇 년간 지내다 왔다는 얘기를 누군가에게 하면, 보통 첫 질문은 “우와, 멜버른 살기 좋아요? 왜 거기로 가셨어요?”이다. 그런데 대화를 조금 더 이어가다 보면 꼭 슬그머니 등장하는 질문이 있다.
“혹시.. 인종차별 당하지는 않으셨나요?”
호주가 백호주의 정책을 폐지한지는 약 50년이 지났지만, 인종 차별을 겪었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종종 들린다. ‘살기 좋은 도시’ 멜버른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지난 코로나19 시기에는 멜버른에 사는 중국인들(중국인 이민자 또는 호주에서 태어난 중국계 사람들 등)이 폭력이나 인종차별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 글은 아시아인으로서 멜버른에서 겪은 인종차별에 관한 얘기는 아니다. 사실 그 반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짧은 유학 기간 동안이나마 멜버른에서 생활하면서 이곳에서 아시아인으로 사는 것이 참 편안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이러한 생각은 멜버른에 오랜 기간 살고 있는 아시아 교민들이 체감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 참고로 이 글에서 아시아인이라는 표현은 호주에서 태어나 호주 국적을 가지고 있더라도 아시아 지역의 선조나 혈통을 둔 사람들을 모두 포괄하는 표현으로 사용했다.)
내가 이곳을 편안하게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다 내린 결론은, 멜버른에 아시아인들, 특히 중국인이 많이 거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유학 온 다른 친구 중에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워낙 많은 아시아인이 멜버른에 거주하다 보니 아시아인으로서 일상생활을 하는데 큰 불편함이 없었다. 한국에서 수입해온 식자재가 조금 비싸기는 해도 일반적인 라면, 된장, 김치 같은 식품들은 어렵지 않게 구매할 수 있었고, 한국 이외의 아시안 식료품을 파는 마트도 많다.
음식점들은 두말할 것도 없다. 특히 시내 중심가인 CBD에는 아시아 음식점들이 밀집되어 있는데, 나는 거기에서 내 인생 음식을 만났다(한국음식 제외). 그것은 마라탕이다. 마라탕은 습하고 으슬으슬한 멜버른의 겨울 날씨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기 제격이었다. 그 당시 한국에는 아직 마라탕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이전이어서 멜버른에서 처음 마라탕을 접했는데, 처음에는 그 강렬한 향신료의 향과 맛에 흠칫 놀랐지만 한입 두입 먹으면 먹을수록 그 맛에 중독되어갔다. 멜버른 CBD에는 중국 식당은 물론이고, 베트남,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인도 음식점들과 한국 식당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금요일 저녁에는 웨이팅이 긴 한국 식당들도 많이 있어서 한참을 기다려 치킨을 사 먹은 적이 있다. 유학생활 기간 동안 했던 외식은 대부분 아시아 음식이었다.
유학생으로 멜버른 생활을 하면서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눈에 띄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특히 대학에서는 더 이질감을 느끼기 어려웠던 것이 멜버른 대학들이 외국인 유학생 유치에 매우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호주 대학의 순위를 매기는 ‘유니버시티 랭킹스(universityrankings.com.au)’에 따르면 호주 대학들 중 국제학생 수가 많은 상위 4개가 멜버른에 위치한 대학들이다. 1위는 멜버른의 RMIT 대학이 차지했는데, 전체 학생의 46.3%가 외국 유학생이다. 대부분의 대학들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재학 중인 국제학생들의 출신 비율을 보여주며, 자기 학교가 얼마나 문화적으로 다양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지를 홍보하곤 한다. 학과마다 편차는 있겠지만 유학생 중 아시아에서 온 학생 수도 어마어마하다. 실제로 어떤 수업 튜토리얼(대형 강의일 경우, 교수님이 강의를 진행하고 학생들을 10~20명 내외로 나누어서 튜터(보통 박사급 조교)들이 학생들과 토론하고 과제를 점검해주는 형태의 수업)에 들어갔더니, 총 20명의 학생 중 3명의 소위 ‘서양인(유럽, 호주, 북아메리카 등)’을 제외하고 모두 아시아 학생이었던 적도 있었다. 물론 교수나 튜터가 아시아인인 경우도 종종 있다.
<멜버른 커피가 유명해진 또 다른 이유>편에서 카페 문화를 발전시킨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멜버른의 인종적 다양성과 그로 인한 도시의 변화를 놓고 봤을 때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사실 멜버른은 전 세계 이민자들이 만들어낸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6년 인구 통계에 따르면 현재 멜버른에는 200개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살고 있고, 이들은 233개의 언어와 방언을 사용하며, 116개의 서로 다른 종교를 믿고 있다.
초기에 멜버른에 정착한 유럽인들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1850년대 빅토리아 주에서 금이 발견되기 이전에 정착한 사람들이다. 그러다 멜버른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중국, 독일, 미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입되는 소위 ‘골드러시’가 시작되었다. 골드러시 이전 멜버른의 인구는 약 2만 5천 명이었으나, 일확천금을 꿈꾸며 멜버른을 찾아온 사람들로 인해 인구는 4만 명까지 급격히 증가한다. 이로 인해 멜버른의 인구가 당시 시드니를 능가하면서 호주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가 된다.
이때 들어온 비유럽인들 중 가장 많은 인종이 중국인들이었다. 1859년 빅토리아 인구의 20% 정도가 중국인이었다고 하니 과연 그 숫자가 어마어마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모든 중국인이 경제적 기회만을 노리고 호주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중국 본토와 동아시아 국가들에서는 가뭄과 기근, 정치적, 사회적 격동기에 본국을 떠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이때 들어온 중국인들을 선조로 둔 사람들이 벌써 5세대라고 하니 중국인들의 이민은 호주 사회의 형성 과정에 매우 주요하게 작용했다. 중국계 호주인의 고향도 다양해서 중국인이라고 해서 다 같은 중국인은 아니었다. 이들은 각자 다른 문화적 배경과 목적을 가지고 호주를 찾아왔다.
그다음으로 많은 수의 이민자들이 한꺼번에 멜버른에 유입된 시기는 세계 대전 시기이다. 2차 세계 대전과 전쟁의 폐해를 피해 지중해 지역, 발칸 반도, 그리스,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레바논, 사이프러스,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등으로부터 유례없이 많은 이민자들이 몰려들었다.
아시아인들의 멜버른 이민 행렬은 1973년 백호주의 정책이 폐기되면서 촉발되었다. 1970년대 이후 중국, 인도 등지에서 많은 수의 이민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2021년 멜버른 인구 통계에 따르면 자신의 혈통으로 영국을 꼽은 사람이 24.8%, 호주 22.5%(호주 원주민이 아닌 단순히 자신의 선조를 호주 사람으로 꼽은 사람들을 의미. 영국과 호주 출신을 제외하면 나머지 절반 이상의 인구는 그 이외 지역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다), 중국 8.8%, 아일랜드 8.2%, 스코틀랜드 6.9%, 이탈리아 6.7%, 인도 5.5%, 그리스 3.6% 순으로, 중국을 꼽은 사람들이 전체 인구의 세 번째로 많았고, 인도를 꼽은 사람들이 일곱 번째로 많다. 2018년 호주 인구 통계에 따르면 중국인은 약 126만 명으로 호주 전체 인구의 5%를 차지한다고 하니, 그 인구 중 많은 수가 멜버른에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아시아 이민자들은 점차 확대되는 추세이다. 아래 그림5와 6은 특정 국가 출신의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을 표시한 지도다. 이 중 아시아 지역은 붉은색으로 표시된 동북아시아, 분홍색의 동남아시아, 노란색의 남아시아 및 중앙아시아이다. (나머지 하늘색은 동유럽 및 서유럽, 파란색은 북서유럽, 연두색은 북아프리카와 중동, 초록색은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를 의미한다.) 멜버른의 동쪽에 동북아시아 출신 이민자들(대부분이 중국인)이 2011년에 비해 2016년에 더 많아진 것을 볼 수 있고, 서쪽과 북쪽으로 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출신 인구가 점차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몸소 체감해보기에는 시장만 한 곳이 없다. 아래 두 사진 중 위 사진(그림7)는 CBD에 위치한 퀸 빅토리아 마켓이고, 아래 사진(그림8)는 베트남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풋츠크레이 마켓의 모습이다. 퀸 빅토리아 마켓은 오래된 멜버른의 전통시장으로, 이 시장이 위치하고 있는 멜버른 CBD에도 중국인들이 많이 거주하긴 하지만 호주인들도 즐겨 찾는다. 반면, 풋츠크레이 마켓은 방문하는 손님들의 인종 비율뿐만 아니라 상인들, 판매하는 물건의 종류, 사용하는 언어, 인테리어나 시장 분위기 자체가 전혀 다르다. 마치 아시아의 어느 도시에 와있는 느낌이다.
멜버니언들도 종종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얘기를 하곤 한다. CBD에 가면 여기가 호주인지 아시아 어느 국가인지 모르겠다고. 실제로 CBD에 거주하는 중국인(유학생, 워킹홀리데이 등 포함)들이 많기도 하지만, 그만큼 멜버른에서 아시안 커뮤니티는 크고 정치적 영향력 또한 그에 못지않다. 2023년 2월 현재 멜버른 지역 정부(City of Melbourne, CBD 지역을 포함한 지자체를 의미)의 의회의원 11명 중 4명이 아시아인(중국, 인도계)이다.
이러한 중국인들의 위상은 멜버른의 차이나타운의 위치와 역사에서도 드러난다. 멜버른의 차이나타운은 1850년대 만들어진 이래 현재까지 시내 중심가인 CBD에 위치하고 있고, 현재는 멜버른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 하나이다. 물론 처음 만들어진 당시에는 이곳이 중심가가 아닌 도심의 외곽 지역이었다. 금광으로 향하는 중국인들에게 값싼 숙식을 제공하는 일종의 베이스캠프 같은 역할을 했다. 이제 막 멜버른이 도시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초기에 언어도 문화도 다른 서구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회적 유대를 갖고 싶었던 중국인들은 현재의 리틀 보크 스트리트에 모여 살았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차이나타운이라는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멜버른에 있는 차이나타운이 서구권 도시에 만들어진 중국인 정착촌 중 가장 오래되고 지속적으로 유지된 곳이라는 점이다. 멜버른의 차이나타운은 남반구에 있는 가장 오래된 차이나타운이기도 하다. 1990년대 이후부터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 멜버른의 부동산 가격에 비추어볼 때, 현재의 차이나타운이 위치한 금싸라기 땅에 170년 가까이 재개발되지 않고 초기 모습을 현재까지 거의 유지해 왔다는 사실이 놀랍다.
오늘날 멜버른에 굳건히 자리 잡은 중국인 커뮤니티를 보고 있자면 중국인들이 호주에 정착하는 과정이 그리 어려웠을까 싶지만, 사실 중국인들의 호주에 정착하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사회적 차별과 냉대를 겪었다. 금을 찾아 호주를 찾는 중국인들이 많아지자 그들이 받는 저임금으로 인해 백인들의 임금도 낮아지게 되었다고 판단한 빅토리아주 정부는 호주로 들어오는 중국인들의 수를 제한하기 위해 1855년 특정 이민자들에 관한 법(Act to Make Provisions for Certain Immigrants, 여기서 ‘특정 이민자’란 중국인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Chinese Immigration Act of 1855’라고 불린다)을 제정한다. 이 법에 따라 빅토리아주에 도착하는 모든 중국인들은 세금을 내야 했고, 빅토리아주로 향하는 선박에 탈 수 있는 중국인들의 수도 제한되었다.
이러한 빅토리아주의 조치는 호주 내 다른 주들에도 영향을 미쳤다. 1901년 호주가 영국으로 독립한 이후 처음으로 자체적으로 제정한 법 가운데 ‘1901년 이민제한법(1901 Immigration Restriction Act)’이 포함되게 된다. 이로 인해 유럽이 아닌 다른 대부분의 국가들로부터 호주 이민이 제한되었다. 특히 이 법에 따라 이민을 신청하려면 영어 받아쓰기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는데, 당시 젊은 중국인 노동자들은 이 영어시험을 통과하기가 어려워 은퇴한 중국인 노동자들의 뒤를 잇기 어려워졌다. 이민제한법은 호주가 단일 문화권을 꿈꾸며 시작한 백호주의 정책(White Australia Policy, 1901년부터 1973년까지 호주 정부가 추진한 비백인 이민 제한 정책) 근간이 된다.
빅토리아주의 중국인들은 1855년 이민제한법과 그들에게만 부과되는 차별적인 세금에 저항하기 위해 시위, 항의 행진, 청원서 제출 등 반대 운동을 오래도록 펼쳤다. 시민 불복종의 일환으로 세금 납부를 거부하기도 하면서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후 유럽인들도 중국인들을 지지하면서 1855년 이민제한법과 세금의 일부가 일시적으로 폐지되는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그에 반대하는 세력에 따라 법이 다시 시행되었다.
사실 차이나타운에 대한 기존 호주 사람들의 인식은 썩 좋은 것이 아니었다. 금을 찾아 멜버른을 드나들던 중국인들이 많이 머물던 1850년대에는 그곳이 도박, 마약, 성범죄 등 온갖 불법과 비도덕의 소굴로 악명이 높았다. 이곳은 멜버른이라는 도시와 별개인 중국인들만의 또 다른 세계로 인식되었다. 골드러시의 열기가 잦아들 1860년대 무렵부터는 차이나타운이 가구 생산 중심지로 점차 바뀌어나갔다. 중국 가구 제조업자들은 수준 높은 장인정신과 합리적인 가격을 바탕으로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구 제조업도 현지 호주인들의 견제를 받았다. 빅토리아 주정부는 1896년 공장소매점법(Factories and Shops Act)을 제정하여, 가구들을 판매할 때 제조업자와 관련된 상세한 내용을 반드시 기입하고 도장을 받도록 했다. 이는 고객들로 하여금 호주인들이 만든 제품을 구입하도록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중국 이민자들 중에는 과일 도매상들도 많았다. 중국 상인들은 무역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중국 교민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과일을 판매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이 당시 호주의 북동쪽 퀸즐랜드주에서 바나나를 수입해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또한 현지인들의 견제를 받았다. 퀸즐랜드 의회는 1921년 바나나산업보호법을 통과시켜, 모든 바나나 업계 종사자들에게 영어시험을 통과해야만 바나나 유통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들로 인해 중국인들은 과일 판매업에서도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백호주의 정책과 1930년대 대공황에 따라 멜버른에 거주하던 중국인의 수는 1861년 약 2만 5천 명에서 1933년 2천 명으로 10분의 1 이상 줄어든다. 멜버른의 차이나타운은 축소되어 소수의 가게들만 남게 되었다. 1920년대부터 차이나타운에는 카페, 식당들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이 당시 중국인들의 대부분은 남중국 지역에서 온 이민자들이어서 광둥 지역 음식들이 주를 이루었다. 1940년대 2차 세계대전 기간에 중국 음식점들은 호황을 맞이하는데, 그 손님들의 대부분은 호주 및 연합군 부대의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막사에서 식사를 하기보다는 외식을 선호했고 지역 경제 회생에 큰 역할을 했다.
백호주의 정책에 서서히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전쟁과 그에 따른 호주인들의 불안감이었다. 1942년 영국이 자신들의 령이었던 싱가포르에서 일본의 침략에 패배하고, 호주의 도시들도 일본군의 폭격을 받았다. 2차 세계대전의 트라우마를 겪으면서 호주에는 “인구가 늘지 않으면 소멸될 것이다”라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인구가 다른 나라에 비해 적은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 유럽 이민자들뿐만 아니라 아시아인들을 빠르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이민 제한 정책이 조금씩 완화되면서 1930년대부터는 중국인 요리사와 카페 종사자들에게 영어 받아쓰기 시험이 면제되었다. 1949년부터 사업차 호주에 들어오는 비유럽권 사람들에게 영주권을 제공하기 시작했고, 1950년부터는 호주 대학으로 유학 오는 아시아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허가해주었다. 1958년 이민법(Migration Act)에 따라 받아쓰기 시험이 완전히 폐지되고 백호주의 정책이 폐지되자 중국인을 비롯한 아시아 이민자들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백호주의 정책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자, 1960년 멜버른 대학의 학생들과 교수진들은 이민 정책에 대해 “규제냐 인종 차별이냐(Control or Colour Bar?)”라는 제목의 정책 제안서를 발표한다. 이들은 이 제안서를 통해 호주의 백호주의 정책의 비논리성, 정책 근거의 결여, 정책 지지자들이 아시아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에 등에 대한 조목조목 반박하며 정부의 인종차별적 이민 제한 정책에 대한 변경을 촉구했다.
이러한 노력들은 결국 1973년 백호주의 정책의 폐기로 이어진다. 1975년 인종 차별 금지에 관한 법률(Racial Discrimination Act 1975)이 제정되며, 기존의 ‘동화’ 정책은 ‘통합’ 정책으로 대체되었고, ‘다문화주의’가 호주 정부의 새 정책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호주는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고 다원주의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호주 연방 정부의 문화적 다원주의 정책과 1980년대의 다문화주의 정책의 영향은 실로 어마어마해서 연방 정부의 영역을 넘어 지역 정부 정책까지 다원주의적 사고방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도시계획과 같은 다문화주의와 일견 무관해 보이는 영역에까지 스며들어 갔다. 멜버른의 차이나타운이 초기의 모습을 꽤 많이 보존하면서도 그 특색을 강화하기 위한 방식으로 재활성화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영향이었다.
멜버른 지역 정부의 차이나타운 재활성화 정책은 여러 단계에 걸쳐 이루어졌다. 첫 번째 단계는 1975년부터 시작된 5개년 재단장 프로그램이었다. 이 일환으로 4개의 중국식 아치형 대문이 차이나타운 세워졌다. 아치 중 일부는 중국 본토의 것을 그대로 모방한 형태도 있었다. 이러한 정부의 차이나타운의 관광지화 정책을 지지하는 중국 교민들도 있었지만,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정책이 중국인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을 오히려 강화할 수 있다며 우려했다. 그들을 중국인들이 호주 시민의 일부로서가 아닌 단순 호기심의 대상으로 여겨질 수 있음을 걱정했다.
그러한 우려와 반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차이나타운 프로젝트는 계속 진행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1983년부터 1988년까지 이루어졌는데, 첫 번째 단계에서 진행된 재단장이 충분치 않다고 판단을 한 정부는 차이나타운의 활력과 지속성을 보여줄 수 있도록 차이나타운 도시디자인 계획을 세워 차이나타운을 다른 곳과 분명히 차별화함으로써 그 특색을 보장하기로 정책방향을 정한다. 그러나 1980년대 다문화주의 논의가 확장되며 차이나타운은 관광객들만을 위한 곳이 아닌 호주에서의 중국인들의 존재의 상징으로써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며 두 번째 단계의 계획은 추가적인 조사를 거쳐 보다 문화적, 사회적 감수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수정된다.
이 일환으로 1984 차이나타운역사지구법(Chinatown Historic Precinct Act 1984)이 제정되고, 이에 따라 차이나타운역사지구위원회가 꾸려져 차이나타운에 대한 관리, 개발, 홍보 등을 전체적으로 감독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한 차이나타운 역사지구 보존을 위한 별도의 예산도 만들어진다. 이 법의 목적은 엄청난 재개발 압력으로부터 현존하는 차이나타운의 문화유산과 도시적 구조를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그에 따라 새로운 건물을 짓는 등 개발을 하려면 이 위원회의 검토를 받아야 하고, 기존 건물 소유자들도 건물의 외형을 유지하여 차이나타운의 특색을 유지할 의무가 생겼다.
또한 멜버른 지역 정부와 빅토리아관광위원회(Victorian Tourism Commission)는 1985년 ‘차이나타운 액션 플랜’을 발표했는데, 그 플랜에 따라 차이나타운의 특색을 강화할 수 있도록 보도의 패턴, 가로등과 조명, 각종 가로시설물들이 재정비되었다. 이 액션 플랜에 대해서도 이 계획이 일종의 관광객용 미끼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비난이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호주 백인들에게 차이나타운은 특별하고 차별화된 곳이었고, 정책 실행 과정에서도 그러한 인식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그림15의 아치형 대문은 중국 난징에 있는 명나라 시대의 복제품인데, 정부는 이러한 아치형 입구가 차이나타운을 더 '중국스럽게' 만들어줄 것이라 기대했다.
이 일환으로 1985년 중국계 호주인 역사를 다룬 박물관도 설립된다(현재 영문 공식 명칭은 The Chinese History Museum이다). 중국역사박물관(The Chinese Museum)에 가보면 호주에 정착한 중국인들의 약 200년간의 역사를 상세히 알 수 있다 (입장료가 있지만,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방문해볼 것을 추천한다). 중국인들이 호주에 정착하면서 겪었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어려움과 차별, 그들의 희생에 기반한 중국계 후손들의 적응 과정까지 체험과 설명이 적절히 섞여있어 지루하지 않게 관람할 수 있다.
1990년대부터는 많은 수의 중국 학생들이 멜버른 도심에 있는 대학들로 유학을 오게 되면서, 이들을 위한 옷가게, 화장품 가게, 식당, 서점, 게임장, 음반 가게 등 각종 사업체가 생겨나며 차이나타운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사실 차이나타운은 호주의 다문화주의 정책과 멜버른의 도시계획, (다소 논란이 있는) 관광지 개발 정책과 도시 디자인이 어우러진 결과물이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나에게 차이나타운은 때때로 낯선 환경에 지쳐 고향이 그리울 때 묘한 안도감과 안락함을 주는 장소였다.
나 같은 한국인에게도 품을 내어줘서 고마웠어, 차이나타운.
참고 사이트 및 자료 등
2. Anderson, K. (1990). ‘Chinatown re‐oriented’: a critical analysis of recent redevelopment schemes in a Melbourne and Sydney enclave. Australian Geographical Studies, 28(2), 137-154.
3. Chau, H. W., Dupre, K., & Xu, B. (2016, June). Melbourne Chinatown as an iconic enclave. Australasian Urban History Planning History Group, Griffith University, 13th Australasian Urban History Planning History Conference, 31 January-3 February 2016, Gold Coast, Australia.
4. Chinatown action plan. Prepared by City Strategic Planning Division, Technical Services Department, Melbourne City Council ; with the assistance of Victorian Tourism Com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