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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폴로 Jan 03. 2023

고층빌딩 숲 속 작은 벽돌집에 담긴 사연

멜버른의 악명 높았던 슬럼, 리틀 론(Little Lon)

멜버른 CBD 북동쪽을 걷다 보면 고층빌딩들 사이에 오래된 단층 벽돌 건물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서울로 치면, 광화문의 높은 건물들 사이에 낮은 궁궐들이 있는 모양새나 북촌 한옥마을 정도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여기는 궁전도 전통 건축 마을도 아니다. 주변의 화려한 건물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볼품없고 소박한 단층의 붉은 벽돌집 한 채가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다.


이곳은 현재 ‘리틀 론 양조장(Little Lon Distlling Co.)’이라는 상호를 가진 술집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 가게가 이름을 딴 ‘리틀 론’이 이번 편의 주인공이다. ‘리틀 론’은 리틀 론즈데일 스트리트(Little Lonsdale Street)의 줄임말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1840년대 생겨난 리틀 론즈데일 스트리트 일대의 지역을 일컫는다. 북쪽으로는 리틀 론즈데일 스트리트, 남쪽으로는 론즈데일 스트리트(Lonsdale Street), 서쪽으로는 엑시비션 스트리트(Exhibition Street), 동쪽으로는 스프링 스트리트(Spring Street)가 둘러싸고 있던 곳이다.

그림1. ‘리틀 론 양조장(Little Lon Distilling Co.)’ (사진출처 : 업체 공식홈페이지)


이 지역은 지금으로부터 약 70년 전인 1950년대까지 이 도시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거주하던 슬럼가였다. 1850년대 무렵 골드러시로 멜버른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며 도시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함과 동시에 도시의 한쪽 구석에는 빈민촌이 형성되었고, 그곳은 ‘리틀 론’으로 불렸다. 이곳은 도시의 최하층민, 성매매 여성들, 마약쟁이들, 과부들,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한 이민자들, 불량배들이 다수 거주했던 지역으로, 멜버니언들에게는 주류 사회와 동떨어진 공포의 장소로 여겨졌다.


특히 이곳은 멜버른의 대표적인 사창가이기도 했다. 19세기말 이곳에는 17개의 성매매업소가 있었다. 1907년까지는 성매매업이 빅토리아주에서 불법이 아니었다. (참고로 아편도 1800년대 당시에는 치료 목적으로 허용되었던 작물이었다.)


1880년대 이곳을 주름잡던 사창가의 여왕은 ‘마담 브뤼셀(Madame Brussels, 1851-1908, 본명은 Caroline Hodgson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성매매업소를 운영하던 여성으로, 당대 매우 유명한 업주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이 일대에 3개의 고급 성매매업소를 운영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리틀 론’의 동쪽 가장자리인 스프링 스트리트의 건너에 국회가 자리 잡고 있는 만큼 그녀의 손님 중에는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성공한 사업가들, 법조계 인사 등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들은 마담 브뤼셀이 성매매업소를 운영하고 관리하는데 있어 법률에 저촉되는 행위들로 인해 기소되는 것을 막아주었다고 한다. 그녀의 사업은 성공적이었고 그를 통해 많은 부를 이루었다. 오늘날 멜버른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술집과 식당들이 있으며, 특히 과거 그녀가 운영했던 성매매업소가 있던 곳을 ‘마담 브뤼셀 골목(Madame Brussels Lane)’이라 부른다.

그림2. 마담 브뤼셀의 모습(사진 출처 : Deakin University)


현 도심 한복판에 있던 과거의 빈민촌을 발굴 조사해서 복원하거나 전시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일반적으로 빈민촌은 도시에서 감추고 싶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든 도시에는 화려함과 어두움이 공존하지만, 그 도시가 가진 어두운 면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싶은 도시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도시화 과정 속에서는 빈민촌은 재개발의 대상이 되고, 재개발 이후에는 과거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멜버른도 그 중 하나였다. ‘리틀 론’의 밖에서 그곳을 바라보던 멜버니언들에게 이곳은 척결해야만 하는 악의 근원지였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이름을 날리던 멜버른에게 ‘리틀 론’은 치명적이었기 때문이다. 멜버른은 19세기 금광에서 얻은 재정적 부를 바탕으로 철도와 전차 등 근대적 시설을 늘려가며 빠르게 성장하였다. 심지어 1885년에 멜버른을 방문했던 영국 언론인 조지 살라는 당시 멜버른의 풍족함과 에너지를 빗대어 이 도시를 ‘경탄할만한 멜버른(Marvellous Melbourne)’이라 불렀고, 이 명성은 20세기까지 이어졌다. 도시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멜버니언들의 생각에 ‘리틀 론’만 없애면 이 도시가 보다 더 도덕성과 교양을 갖춘 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졌다. 그에 따라 ‘리틀 론’ 지역을 정비하는 것은 멜버른의 오랜 숙원 사업이 되었고, 각종 제재와 재개발 시도는 ‘리틀 론’이 생겨난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


1880년대에 이 슬럼가 재정비에 앞장섰던 주체들은 주로 종교단체였다. 리틀 론즈데일 스트리트 근처에는 수녀원이 들어 서 1950년대까지 활동을 했고, 로만 가톨릭 교회도 활발히 활동했다. 1차 세계대전 시기에 잠시 소강상태였던 슬럼 정비 사업은 1930년대 다시 시작되었다. 경찰은 ‘리틀 론’의 해악들과 전면전을 선포하며 이 도시에서 악의 근원을 뿌리 뽑기 위한 캠페인을 펼쳤다. 언론들도 이를 적극 지지했다.

그림3. 1877년 경찰신문에 실린 ‘리틀 론’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그림. 당시 언론사들은 ‘리틀 론’은 잔인하고 어두운 곳으로 묘사했다 (그림 출처 : 빅토리아주립도서관)


빅토리아 주 정부는 1938년 빅토리안 주거 위원회를 설립하고 ‘도시 개선’ 또는 ‘도시 재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대대적인 슬럼가 재정비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리틀 론’ 지역의 길들과 대부분의 건물들이 사라졌다.  ‘슬럼과의 전쟁’은 모더니즘과 도덕주의를 수호하는 일이라 여겨졌다. 1940년대 발표된 ‘빈민가 침투(slum penetrating)’ 정책에는 도심에 주요 시설들과 큰 신작로를 만드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림4. 1901년 경 ‘리틀 론’ 지역에 있던 판잣집과 아이들(출처 : Museum Victoria)

‘리틀 론’이 있던 지역은 고층 정부 청사, 쇼핑 지구, 지하철 신설이 계획되었고 그에 따라 기존의 ‘리틀 론’이 없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1948년 연방 정부는 재개발을 이유로 ‘리틀 론’에 살던 사람들을 강제로 퇴거시키고 부지를 수용했다. ‘리틀 론’ 지역의 주택과 건물들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정부청사, 상업시설, 주거용 빌딩 등을 짓기 위해 깨끗이 철거되었다. 정부는 그 부지에 현대화를 상징하는 국제주의 양식의 모더니즘 건축물인 커먼웰스 정부청사(Commonwealth Centre)를 짓고 그 주변은 아스팔트가 깔린 주차장으로 만들었다. 멜버니언들은 정부의 야심 찬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 정부청사 건물에 ‘초록색 변기(green latrine)’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 정부청사 외관이 초록색 타일로 되어있었는데, 이는 당시 화장실에 쓰였던 타일들과 색깔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림5. 1968년경 ‘리틀 론’ 지역이 재개발된 모습. 초록색 건물이 커먼웰스 센터다. (사진저작권 : Wolfgang Sievers, 출처 : 호주국립도서관)

‘초록색 변기’ 정부 청사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멜버른의 CBD는 1960년대부터 서서히 거주자들이 교외 지역으로 빠져나가면서 공동화 현상을 앓고 있었고, 빅토리아 주정부와 멜버른 지역정부는 여러 가지 정책을 통해 CBD의 주거 여건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들을 펼쳐나갔다. 이 정책들은 ‘우편번호 3000(Postcode 3000)’으로 통칭되는데, 멜버른 CBD 지역의 우편번호가 3000인 것에 착안한 것이었다. 이 우편번호 3000 정책의 주요 목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CBD에 거주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카페 등을 비롯한 소규모 상권을 활성화하고, 가로 환경을 정비하고, 고층 아파트들이 신축될 수 있도록 허가하는 등의 정책들을 펼쳐나갔다. 19세기 중반까지 수평적이던 주거 경관은 20세기 후반 수직적 모습으로 바뀌어 갔고, 이는 멜버른의 중심가의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그 과정에서 정부청사도 상업적 재개발을 위해 1980년대에 철거되었다.


이러한 거듭된 재개발 과정 속에서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건물들이 7개 정도인데, 그중 유일한 주거용 건물이 현 ‘리틀 론 양조장’ 건물이다. 이 건물은 1877년에 존 카셀든(John Casselden)이 건축한 여섯 채의 다닥다닥 붙어 있는 방 세 칸짜리 벽돌집들 중 하나로, 현재 멜버른 CBD에 존재하는 유일한 단층 건물로도 알려져 있다. 그 당시 주소는 건물주의 이름을 따서 카셀든 플레이스(Casselden Place)였다.


존 카셀든은 신발제조업을 하다 이후 신문유통업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이 여섯 채의 집을 계속해서 세를 주었다. 임차인들은 주로 중국인과 싱글 여성들이었다. 이곳의 장점은 저렴한 월세와 도심 중심가라는 좋은 위치였다. 임차했던 싱글 여성들 중 다수는 성매매업 종사자였다고 한다. 1890년까지 카셀든 소유였던 이 오두막들은 1948년 정부에 수용되기 전까지 약 58년간 수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그리고 이 ‘리틀 론 양조장’ 건물과 붙어있던 나머지 다섯 채 건물들은 1960년대 재개발 과정에서 헐리고 고층 빌딩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그러나 운이 좋았던 것인지 이 ‘리틀 론 양조장’ 건물만큼은 유일하게 철거되지 않고 사무실 등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쯤 되면 이 건물이 등록된 문화유산이라 파괴가 되지 않은 것이라 추측해볼 수 있으나, 이 건물이 문화적,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빅토리아 주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시기는 2011년이다. 약 40년간의 재개발 광풍 속에서 유유히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가히 신기할 따름이다.

그림6. 현 ‘리틀 론 양조장’의 1950년 당시 아직 나머지 다섯 채의 오두막이 남아있었을 때 (출처 : 빅토리아주립도서관)


아이러니컬하게도 불과 2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정부의 ‘리틀 론’ 지역에 대한 입장은 180도 변하였다. 당시 ‘초록색 변기’ 정부청사를 사용하고 있던 호주행정통신부(Department of Administrative Services and Telecom Australia)는 과거의 ‘리틀 론’ 지역을 발굴조사하기로 한다. 다행이었던 점은 그 당시 대부분의 부지가 아스팔트가 덮인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었기에 유물들이 오히려 잘 남아 있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1987년 12월에 시작된 첫 번째 발굴조사 결과 약 1만 7천 점의 유물들이 나왔다. 이때 발굴 조사의 범위가 약 6천 평방미터에 달했는데, 이는 그 당시까지 호주에서 있었던 발굴 프로젝트 중 가장 대규모였다. 그 이후에도 네 차례 추가적인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이 중 2002년과 2003년에 진행된 민관합동 조사는 이전 프로젝트의 규모를 넘어서는 초대형 규모로 진행되었고, 12주 만에 약 13만 5천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관련 학계도 유의미한 경험을 할 수 있었고, 발굴 비용을 부담했던 개발업자는 지역 사회와 소통하며 ‘좋은 기업 시민’이라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림7. 2002년에 진행된 ‘리틀 론’ 지역 중 ‘카셀든 플레이스(Casselden Place)’ 발굴 조사 모습 (사진출처 : Tim Murray의 논문)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대규모 발굴 조사가 계획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1987년 발굴조사 이후 당시 역사학자들은 이 발굴조사가 이미 완료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88년과 그 이후 추가적으로 제한적인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이 ‘리틀 론’ 지역이 멜버른의 초기 도시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장소라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특히 1990년대 중후반 일부 학자들은 이 지역에 대해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발굴 조사는 ‘슬럼’이라는 고착화된 이미지와 ‘소외 계층’의 삶의 방식이라는 고정관념에 입각한 조사였다면, 이제는 이곳에 실제 살았던 사람들 즉, ‘내부자’의 이야기와 해석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보다 정교하고,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포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외부에 비추어졌던 ‘홍등가’, ‘마약소굴’, ‘범죄의 온상’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리틀 론’ 거주자들의 긍정적인 삶의 모습들에 대해서도 공평하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리틀 론’은 가난한 노동자들이 살던 지역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안에는 문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다채로운 일상이 살아 숨 쉬던 곳이었다. 이 곳은 아일랜드, 잉글랜드, 이탈리아, 시리아, 인도, 중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으며, 좁고 한정된 공간 안에 학교, 공장, 가게, 교회, 집회장, 술집, 성매매업소, 주거용 집들이 함께 공존했던 곳이었다. 다수의 건물들은 주인이 직접 점유하고 있었다. ‘리틀 론’의 골목들은 일반 대중들에게는 통행로였고, 아이들에게는 놀이 공간이었으며, 여인들에게는 빨래터였고, 가족과 이웃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던 공동체를 위한 공간이기도 했다. 오늘날 멜버른 특징인 다문화, 다민족 사회의 발생 초기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곳이었다.

그림8. 1914년경 ‘리틀 론’에서의 생일잔치 모습 (원본출처: Museum Victoria. 재인용 출처: http://melbournecurious.blogspot.com)


멜버니언들은 이러한 새로운 이야기들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 지역에 해석과 이야기가 과거에 비해 다채로워질 수 있었던 것은 발굴 조사에서 나온 유물들을 기반으로 과거 ‘리틀 론’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과거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이야기들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림9. 어린이용 책 ‘리틀 론’의 표지 그림.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행복했던 ‘리틀 론’ 주민들의 일상 이야기를 담고 있다 (출처 : readingtime.com.au)
그림10. 역사학자 바바라 민친턴이 쓴 『리틀 론의 여성들』표지. 발굴 유물을 바탕으로 19세기 성매매업 종사 여성들의 삶을 그렸다 (출처 : historyvictoria.com)


발굴 조사에서 나온 대부분의 유물들은 박물관에 수장되었다. 멜버른 박물관(Melbourne Museum)에 가면 과거 ‘리틀 론’ 지역의 모습을 재현한 집 모형들을 볼 수 있다. 집들의 외관뿐만 아니라 그 크기, 외부 마감(일부러 오래된 느낌을 주도록 만들어짐), 내부 가구도 동일하게 재현이 되었고, 심지어는 냄새와 조명까지 유사하게 만들어 놓아서 흥미롭다. 특히 이 집 모형들 내부 물건들은 모조리 모조품이라 집안에 들어가 가구에 앉아볼 수도 있고 물건을 만져볼 수도 있다. 물론 진짜 유물들도 이 집 모형 근처에 전시되어 있다.

그림11. 멜버른 박물관 내 ‘리틀 론’ 지역에 있던 집들을 모형 전시

조금 더 현장감을 느끼고 싶다면 ‘리틀 론 양조장’ 근처를 둘러보기를 추천한다. 발굴된 유물 중 일부가 이곳에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 ‘리틀 론’ 거주자들이 사용했던 물건들이 일부 전시되어 있고 역사와 관련된 설명판이 설치되어 있다. 바닥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오래된 돌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당시 골목길의 경계에는 붉은색 돌들이 놓여 있어 당시의 건물과 도로의 비례, 넓이를 가늠해 볼 수도 있다. 또 그 옆 상업용 건물인 어반 워크숍(Urban Workshop) 건물 1층에도 유물 일부가 전시되어 일반인들의 관람이 가능하다. 이 건물의 개발업자가 2002년 발굴 프로젝트의 재원을 제공한 회사다.

그림12. ‘리틀 론 양조장’ 근처에 전시된 유물들. ‘리틀 론’에 살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식기,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 오래된 담뱃대 등이 지도와 함께 전시되어 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면 진실을 온전히 보지 못한다. 내가 알고 있던 사실이 전체의 지극히 일부는 아닌지 혹은 지나치게 왜곡된 것은 아닌지 주의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는 악명 높았던 빈민가로만 알려졌던 ’ 리틀 론‘이 오늘날에는 멜버른 도시 역사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지역이 되었다. 어느새 고층빌딩 숲 속 홀로 남겨진 이 오두막은 바뀌어 가는 현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참고 자료 및 논문 등

1. https://www.theage.com.au/entertainment/books/first-photo-of-madame-brussels-the-red-light-queen-of-1880s-melbourne-20190830-p52mjw.html

2. https://www.oldtreasurybuilding.org.au/madame-brussels/

3. https://web.archive.org/web/20091010033714/http://museumvictoria.com.au/discoverycentre/infosheets/the-melbourne-story/unearthing-little-lon/

4. Mackay, R., McCarthy, J., Sneddon, A. et al. Down Little Lon: An Introduction to the Casselden Place Archaeological Excavations, Melbourne. Int J Histor Archaeol 10, 299–310 (2006). https://doi.org/10.1007/s10761-006-0014-2

5. Alan Mayne & Susan Lawrence (1998) An ethnography of place: Imagining ‘little Lon’, Journal of Australian Studies, 22:57, 93-107, DOI: 10.1080/14443059809387384

6. Charlotte H.F. Smith & Deborah Tout-Smith (2010) Recreating place: Little Lon, Museum Management and Curatorship, 25:1, 37-51, DOI: 10.1080/09647770903529103

7. Murray, T. Integrating Archaeology and History at the “Commonwealth Block”: “Little Lon” and Casselden Place. Int J Histor Archaeol 10, 385–403 (2006). https://doi.org/10.1007/s10761-006-0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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