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실존적 공허는 대게 권태를 느끼는 상태에서 나타난다.
인간의 실존적 공허는 대게 권태를 느끼는 상태에서 나타난다.
'인간은 고민과 권태의 양 극단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도록 운명 지어진 존재'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사실 인간은 고민으로써의 해결보다 권태로서의 해결에서 훨씬 더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은 더욱이 이러한 권태에서 힘들어하고 공허함을 느껴 우울감을 느끼기도 한다.
공허함은 다양한 욕구의 좌절에서 크게 찾아오기도 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과 같다.
정해진 길, 안정적인 길, 위태로운 길 우리는 다양한 길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선택으로 살아가는 듯한 삶이 내가 원치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고 까마득한 벽에 도달해 모든 것을 내려놓아버리는 상황을 빈번하게 경험하게 된다.
때때로 어른들은 “이렇게 세상이 좋아졌는데 왜 힘드냐”라고 묻는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청년들이 겪는 불행의 이유는 어쩌면 누군가로부터 정해진 삶의 방향을 유년시절부터 대학생, 성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에 거쳐 공허함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온다는 사실로부터 시작될지도 모른다.
나는 누군가가 나의 삶을 나아지게 만들어주길 바라지 않으며, 한 번도 바라본 적 없다.
다만, 지금 살고 있는 삶의 진짜 힘든 이유가 무엇인지는 명확히 알고 싶고, 누군가 우리의 삶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때 공허함에 대해 적응해가는 한 사람의 삶을 바라보며 좋은 삶과 나쁜 삶, 옳고 그름으로 나누지 않길 바란 적은 많다.
사람들은 항상 고민하고 그 속에서 혹은 끝에서 답을 얻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살아간다.
또한, 고민 중 어디서 찾을지 모르는 방향성 혹은 애초에 없는 답을 찾기 위한 자기감정 소모로 인해 우울을 느낀다.
삶이 알 듯하면서도 어려운 이유는 상황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며 그 상황은 내가 선택하지 않아도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민하는 것이고 고민의 끝에 반복적인 권태를 느끼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고민의 시간을 줄이고 이 반복을 줄이는 게 결국, 삶의 굴곡을 줄이는 방법일 테고, 잘 살아가기 위해 이 반복을 줄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해본다.
나는 계속해서 불안, 즉 고민 속에서 답을 찾으려 했고 그 답이 주는 권태에서 또다시 불안해했다. 하지만 어쩌면 고민에서의 답이 아니라 권태 속에서의 자기 주도적 삶을 찾아야 한다는 걸 더 잘 알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즉, 삶의 이유를 찾는 것보다 어떠한 삶을 살아갈 때 그 환경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적은 퍼센티지의 즐거움에 더 집중하는 나만의 방법을 만드는 게 어떠한 환경이 내게 주어지더라도 잘 살아내는 방법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잘 살아내는 법의 시작은 타인의 시선에서 철저히 벗어나 내 삶 속에서 일어나는 재밌는 상황들에 집중하고 기억하며 되새기는 것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21살 처음 행복이란 단어를 접하고
지금까지도 나는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다시 되새겨볼 때,
인생의 과정은 지속적 행복 이전에 작게나마 재밌는 일, 즉 사소하지만 일상 속에서도 존재하는 기쁨이라는 감정에 집중하는 과정이 중요했음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행복한 삶을 살기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삶을 살겠다고 하는 것은 앞으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고통이라는 자극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일지도 모른다.